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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묘소(李漢應 墓所) Tomb of Lee Han-eung 지정번호: 용인시 향토유적 제49호 지정년월일: 1999. 7. 14 시대: 1905년(광무 9)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70-1 분류: 무덤 / 봉토분 이한응 열사(1874~1905)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묘소의 위치는 이동면 덕성리 산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상석과 촛대석, 곡담묘비가 있다. 그리고 전해오는 유품으로는 친필유서, 일기, 유방첩 등이 있다. 16세때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28세 때인 광무 5년(1901) 3월 주한 영국, 벨기에 양국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하였으며 광무 6년(1902)에는 공사 민영돈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서리 공사로 임명되었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기울어져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로는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광무 9년(1905) 음력, 4월 9일 3통(조국과 형과 부인에게)의 유서를 남기고 타국땅에서 순절하였다. 꽃다운 나이 방년 32세였다. 이한응 열사의 순절은 국내외의 큰 방향을 일으켰다. 고종황제가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신약(韓日新約)체결로 인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음을 슬퍼하였으며 친히 치제문을 보내어 고인의 애국충정을 치하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内部協辦)에 추서되어 장춘단에 향사(享祀)했다. 또한 황성신문을 통해 그의 순절 소식이 전하여져 많은 애국지사들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였다. 이로부터 7개월 후 민영환 선생이 순절하였으며, 2년 후 이준열사 헤이그 순절이 이어졌다. 이렇게 한말의 입절한 여러 순국열사 중에서 범(絶)을 보였다는 점에서 선생의 순절은 더 한층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선생의 유체와 유품을 보내온 주 런던 영예총영사 마켕톤의 편지을 통해 볼 때 그가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눌리지 않고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추모회가 만들어져 유사(遺史)가 간행된 바 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