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page


165page

시에 45세를 일기로 견지동 그의 옛 겸종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하였다. 공의 순사가 발표되자 온 겨레는 비분과 감격의 도가니속에 잠겼으며 고종께서도 크게 슲어하사 예장을 명하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의정에 증직하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으며 외국공사도 정중한 조의를 표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해 공의 본저에는 순절할 때의 혈의를 봉안한 마루 틈에서 4경 45엽의 대나무가 솟아올라왔다. 당시 이것을 공의 충절의 화물이라 하여 혈죽이라하고 내와인사가 감탄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공은 처음에 정경부인 안동김씨와 결혼하고 뒤에 정경부인 밀양박씨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시었다. 공의 유택은 처음에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정하였다가 뒤에 동군 구성면 마북리로 옮겨 두 부인과 합장하였다. 공의 충절은 일월과 같이 빛나는 것이나 일제 40년동안 암흑 속에 파묻혀있다가 해방 후 다시 광채를 나타내어 국민도의의 지표가 되었으며 민충정공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서울시비로 동상을 건립하고 국비로 유고를 발간하고 이제 또 경기도지사 최헌길씨의 발의로 도솔하 전 공무원으로부터 성금의 갹출하여 묘지를 묘지를 보수하고 신도비를 수립함에 이르렀으니 공의 충열은 우리 민족과 함꼐 길이 빛날진져 단기 4292년 기해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