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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강제로 생도를 모집하는 등으로 4년에 졸업하게 하여 노소 다수 인사가 이곳을 경유 또는 진학하는 등 농업종사 인사들도 문자와 숫자를 무난히 해독 사용케 하였다. 그러나 기미구에 일제하 당국의 간섭으로 애퇴일로 우기야는 명칭조차도 강습소로 강제 격하당하였으며 공립 보통학교가 근처에 설립될 때까지 십 수년 간 근 존속되였다. 숭고결재라 기 설립정신이여! 오호라 기미로의 기구함이여! 비록 잠시 반짝하였다가 미구에 사라진 이 과도기 미세사적은 지금 기기억조차 사라저가는 과거사가 되여 버려는 순간이 되려함에 이곳을 경유한 인근 거주자들의 문맹퇴치 등 지대한 기여가 있었음에 현 생존 구 생도 수삼인이 모의하여 기 사적의 일부나마 이를 남겨서 후일을 위하여 이를 표함에 옛터 534의 3, 502번지에 못 세우고 세태 변천을 한하면서 다만 기정신을 받드러 이후 많은 영재가 이 땅에서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