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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1·3 학생독립운동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11·3 학생독립운동 정신의 계승 38 2019년은 11·3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지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독립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남은 과제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독립유공자는 모두 427명으로(2018년 8월 기준) 건국훈 장 246명, 건국포장 56명, 대통령 표창 125명입니다. 앞으로 국가보훈처는 포상 심사기준을 개정, 일제강점기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해 퇴학을 당한 경우도 추가 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공자가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서훈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1·3 학생독립운동과 관련 해서 4년을 선고받은 장재성도 그 중 한 분입니다. 장재성은 성진회의 창립 회원이 었고, 독서회중앙부 총 책임자였습니다. 한마디로 11·3 학생독립운동의 최고 리더 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1절을 앞두고 김구 주석, 안중근 의사 등 208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표창을 합니다. 명단에 장재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 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서훈을 취소해 버립니다. 이 내용이 당시 동아일 보(1962년 3월 1일자)에 ‘장재성씨 수훈 취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장재성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민주주의민 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을 지냅니다. 그는 분단에 반대해 세 차례에 걸쳐 남과 북을 오가다 1948년 검거돼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광주에 들어오기 직전에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 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하고 맙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기홍도 그 중 한 분입니다. 이기홍은 광주고보 2년 재학 중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했습니다. 1930 년 초 당시 반장으로 백지동맹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하자,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