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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940년대 일어난 ‘무등회 사건’은 무엇인가요? 11·3 학생독립운동 정신의 계승 36 2) 제2차 무등회 사건 1942년 5월 신균우·기영도 등 20여 명이 ‘무등회’를 재건합니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까지 구상하였는데, 이는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기영도의 다음 말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으로 일제는 동양의 적이요, 무력은 우세 하지만 군수물자와 과학력 면에서는 도저히 미·영·소에 대항할 수 없다. 장기전이 되면 일제의 패배는 필연적이며 그 때야말로 조선독립의 절호의 시기다. 만일에 일 제가 승리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때에는 일제가 피폐하고 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 하여 동족이 일제히 궐기한다면 용이하게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요. 독립할 때 에는 전조선 각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의 학생과 다소의 군사교련을 받은 자를 동원한 다면 대략 35∼3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어 최소한도의 군사력은 가능하다.” 회원들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 차별정책을 학교 내에서 부각시키며 싸워 나갔습니다. 4학년 신삼용은 내선일체 교육에 광분하던 에노모도 교장의 얼굴을 독사로 그리고 “조선어를 상용하자” 라고 써서 변소와 창고 등의 구석진 곳에 붙여 놓았다가 퇴학 당하였습니다. 조병대는 봉안전에 있었던 일본 국왕부부의 사진액자에 지렁이를 집 어넣어 기어 다니게 하고, 차별을 일삼는 일본 교사의 책상 서랍 속에 인분 봉투를 집어넣어 민족차별에 항거하였습니다. 무등회 회원들의 항일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부 하급생들 사이에 친일 분위기가 성 행합니다. 이에 1943년 4월, 신균우·배종국 등 무등회 회원들이 점심시간 및 쉬는 시간을 활용하여 하급생들의 교실을 순회하면서 항일운동의 필요성과 조선어 사용 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급생 중 한명이 밀고하여 주동자 몇 사람이 교장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