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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학교에 남은 학생들의 투쟁 방식은 어떠했나요? 법정 투쟁과 옥중 투쟁 35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학생과 사회단체 간부들이 구속된 이후에도 학생들 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잡혀 들어간 학생들은 옥중 투쟁과 법정 투쟁을 벌였고, 남아 있는 학생들은 이듬해 1월 백지동맹 등을 일으켰습니다.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광주 지역의 각 학교는 1930년 1월 8일 개학합니다. 휴 교 때문에 2학기 시험을 치르지 못한 학교는 개학 다음날부터 시험을 실시합니다. 광주고보에서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으로 맞섰고, 광주 여고보도 3학년 전체가 백지동맹에 참여합니다. 이로 인해 광주고보에서는 17명이, 광주여고보는 15명이 또 퇴학을 당합니다. 학교의 퇴학처분에도 학생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 1월 광주고보 생은 다시 3차 시위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또 다시 48명이 무더 기로 퇴학을 당합니다. 당시 광주고보는 1학년을 제외한 전체 학생이 400여 명이었 는데, 이 가운데 졸업한 학생은 160명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열망 하는 학생들의 뜻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아마도 암담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과 사회과학 연구 그리고 유학생 선배들과의 교류에 의해서 축적되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고보의 경우 한문과 조선어를 가르쳤던 송홍 선생의 영향 도 적지 않았습니다. 송홍 선생(1872~1949)은 한말의 이름난 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늘 한복을 입고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몰래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세계정세와 민족의 진로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역설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학생 들을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았습니다. 그는 1930년 2월 19일 제자들이 두 번째 공 판을 받는 날 ‘자연으로 돌아가며 학생 제군에게 주는 글’이라는 시 한수를 남기고 학교를 사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