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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광주 소식을 들은 목포와 나주 지역 학생들은 어떻게 호응하였나요? 광주를 넘어 전국·해외로의 확산 26 광주 학생들의 대시위에 호응하여 가장 먼저 시위가 일어난 학교는 목포상업학교 였습니다. 광주에서 독서회가 결성될 때 목포상업학교에서도 독서회가 결성되어 서 로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이 121명, 일본인 학생이 130명인 한·일 공 학으로 민족 차별의 설움을 다른 학교보다 더 많이 받아 왔기 때문에 그만큼 항일민 족의식도 강하였습니다. 광주의 시위 소식을 접한 학생들은 11월 7일 비밀리에 모임을 갖습니다. 최창호· 이인형은 11월 9일 광주에서 장재성을 만나 19일에 목포에서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1월 19일 아침, 등교하자마자 이인형은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 오후 1 시 30분 경, 50여 명의 학생들이 정명여학교 앞에 모여 ‘피감금학생 즉시탈환’, ‘피 압박민족 해방만세’ 등을 쓴 붉은 색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합니다. 시위대는 목포역전까지 진출하지만, 출동한 100여 명의 경찰에 포위되어 40여 명이 체포됩 니다. 학생들은 시위가 사전에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에서 외부로 통하는 전 화선을 절단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인형 등은 1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월 7일에는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시위를 전개하려다 발각되어 9명이 잡혀갔고, 학교는 무기한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나주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었기 때문에 나주학생들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예상하고 경찰은 경계를 엄중히 하 여 사태를 막고자 하였지만, 학생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