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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학생들의 1차 시위에 대해 일제는 어떻게 대응하였나요? 11월 3일, 그 날 22 시위대가 시내로 진출하자 경찰은 소방대와 재향군인까지 동원하여 길을 가로막고 시위대를 저지합니다. 경찰들은 나중에 학생들을 검거하기 위해 입고 있는 교복에 흰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광주여고보 소녀회 학생들은 경찰 몰래 물수건으로 분필 자국을 지워버립니다. 대시위가 막을 내린 후, 그날 저녁부터 경찰은 전라도의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주 동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휴교는 9일까지 다시 3일간 연장되 었습니다. 광주시내 곳곳에는 무장경찰이 배치되었고, 한국인 학생 4~ 5명만 모여 있어도 닥치는 대로 잡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일반 시민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었 습니다. 11일까지 7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잡혀갔습니다. 이중에는 최쌍현 등 중상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인 학생은 7명이 체포되었지만 얼 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습니다.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 본인 학생들은 즉시 도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한 반면,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부상 정도가 심한 학생 9명만이 개인 병원인 태양의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도립병원장은 광주경찰서 사법주임과 함께 태양의원에 나타나 학생들의 부상 부위를 보고 입원할 필요가 없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 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편파적인 태도에 분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한국인 언론들도 연일 일제의 탄압과 불공평한 처사를 비난하였지만, 일제는 사건을 단순한 ‘내선 학생간의 충돌사건’으로 평가절 하하며 강력히 탄압하여 조기에 수습하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