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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시위대는 20여명의 경찰들이 지키고 있던 가가야 상점(현 충장로 3가에 위치) 앞 저지선을 돌파하고 도청에 이르자, 100여 명의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이 교문을 무너 뜨리고 나와 합세합니다. 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도립병원(현 전남대학교병원) 쪽으로 향합니다. 병 원 앞 광장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집니 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장작과 각목 등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학생들이 응하지 않자 검을 빼어들고 팔을 잘라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학생들은 ‘조선 독립’과 ‘식 민지 노예 교육 철폐’라는 의사를 표시한 만큼,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장작과 각목 등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광주 3·1운동의 태동지였던 양림동으로 향 합니다. 경찰이 따라왔지만 개의치 않고 광주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부동교(현 금교) 를 건넙니다. 이곳에서 전남사범학교와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해산하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교를 지나 학교로 돌아옵니다. 그 때 시간이 오후 5시경이었습니다. 이로써 11월 3일의 대시위가 막을 내립니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이 강당에 모이자, 와타나베 교감은 “오늘의 사태를 논하기 전에 이처럼 고조된 분위기에서는 수업을 해 보았자 효과가 없을 것이니, 흥분을 가 라앉혀 평온을 되찾았을 때 공부하기로 하고 3일간 휴교한다. 사고 없이 귀가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교사들과 함께 퇴장하였습니다. 상황은 이미 학교에서 해결 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학생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광주 시내가 집인 학생들은 각 방면별로 집단을 이루어 귀가하였으며, 열차 통학생들은 기숙사생과 학교 주변에 사는 학생들이 같 이 가 주었습니다. 시위가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1월 6일, 당시 신문은 11월 3일의 시위를 3·1운동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이는 광주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게 이날의 대규모 시위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