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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성진회’ 결성의 주역은 누구인가요? 11·3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학생 조직 13 광복 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및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대표 등을 맡는 등 민족운동에 앞장섭니다. 남북분단 에 반대해 세 차례 38선 이북을 왕래하다가 1948년에 검거되어 광주형무소에 복역 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에 총살되었습니다. 수많은 학생독립운동 주역들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재성은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 때문입 니다. 장재성을 비롯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 우리 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다 폭넓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인생(1903∼1929)은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장재성· 왕재일 등과 성진회를 조직하여 서기를 맡아 회의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일 본에서 유학하며 항일운동을 펼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모진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던 박인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1929년 5 월 사망합니다.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습니다. 정남균(1905∼1950)은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 성진회 조직에 참여합니다. 조직의 기밀누설 위험이 생기자 성진회를 해체하지만 성진회의 해체는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학생들은 항일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정남균 역시 학 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을 취하였으며,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정부 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