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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성진회’ 결성의 주역은 누구인가요? 11·3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학생 조직 13 1926년 11월 3일 16명으로 구성된 성진회는 모두가 주역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성진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선 인물 4명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왕재일(1904∼1961)은 구례에서 태어났습니다. 숭일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형 편이 어려워 중퇴하였습니다. 그 후 광주청년회에서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민중계 몽 등 교육 강연회에 참석하며 독립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면서 자신의 역량을 늘리 기 위해 광주고보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광주고보에 재학 중 민족차별에 대하여 독립에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이에 같은 학교 장재성,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과 함 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드디어 1926년 11월 3일 최규창 에 집에서 성진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활동합니다. “깨달아 나아가자”라는 뜻의 ‘성진회’도 왕재일이 제안한 이름이었습니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검거자의 탈환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확립 등 격문을 배포하다가 붙잡혀,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이후 전남 운동협의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민운동과 야학회 활동에 앞장서다가 또다시 징역 2년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장재성(1908∼1950)은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고보에 재학 중이던 1926 년 11월 3일, 성진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광주고보 졸업 후에 는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예과에 입학합니다. 일본 유학 중에도 1928년 이경채 사건으로 인한 대맹휴투쟁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학생들을 지도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섭니다. 1929년 6월 귀국하여 ‘독서회중앙부’를 설치하고 각 학교 독서모임을 독서회로 개편합니다.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광주 학생을 지도하다가 책임을 맡았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습니다. 장재성이 받은 징역 4년은 11·3 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가장 높은 형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