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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성진회’가 해체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2 11·3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학생 조직 매월 두 차례씩 토론하면서 성진회의 의식은 날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채영석이었습니다. 채영석의 형이 광주경 찰서 순사부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성진회 조직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었습니 다. 회원들은 채영석의 눈을 피해가며 논의한 결과 그를 제명하기로 결정을 내립니 다. 장재성은 고민 끝에 모임 활동을 중지하자고 제안합니다. 성진회가 결성된 지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난 12월 셋째 주 토요일이었습니다. 1927년 1월에는 전혀 모임 을 갖지 않았습니다. 2월 2일 설날, 장재성이 취한 척 하며 다시 성진회 해산을 제안 합니다. 이에 문승수가 맞장구를 칩니다. 2월 4일, 채영석이 자기 집으로 회원 전원을 초대하자, 이 자리에서 장재성은 “비 밀 유지도 어렵고, 졸업할 사람도 많으니 해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이에 어떤 회원은 반대, 어떤 회원은 찬성 등 갑론을박이 진행됩니다. 물론 채영석 을 제외한 모든 회원이 미리 짜인 각본대로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만장일치로 성진회 해체를 선언합니다.(일제의 판결문에는 3월 경 정남균의 집에서 해체했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성진회는 해체됩니다. 하지만 성진회 회원들은 계속해서 학생들 을 지도하면서 학생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