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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광주의 첫 번째 학생조직인 ‘성진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11·3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학생 조직 11 왕재일은 광주고보 학생 포섭에 나섭니다. 고민 끝에 가장 먼저 접촉한 사람이 장 재성이었습니다. 둘은 같은 4학년이었지만 나이는 왕재일이 4살 많았습니다. 왕재 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조한 장재성은 정남균과 박인생과 만나 의기투합합니다. 활발한 접촉으로 조직이 곧 결성될 것 같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왕재일의 고달픈 나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광주역에서 신문을 받아서 지국으로 가져가 야 했고, 구독료 징수, 광고모집 등 잡다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이 로 인해 광주고보 학생 포섭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 1926년 4월 장재성이 광주고보 안종익·최규창과 함께 광주농업학교 박인생·정남균을 만납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서로 간에 의중을 확인하고 함께 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극을 받아 함께할 회원들 이 늘어납니다. 마침내 10월 하순 경 왕재일과 장재성이 박인생의 하숙집을 찾아가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합니다. 성진회, 드디어 결성되다 드디어 11월 3일 저녁 7시, 장재성의 제안으로 지금의 불로동에 있는 최규창의 하 숙집에 광주농교 6명, 광주고보 9명 등 총 15명이 모였습니다. 이날 모인 15명은 김광용, 안종익, 왕재일, 임주홍, 장재성, 정우채, 채영석, 최규창, 최용호(이상 고 보),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정남균, 정동수, 정종석(이상 농교)이었습니다. 함께 하기로 한 담양 출신의 국순엽(고보 4학년)은 집안 제사로 불참하였지만, 결성 이후 에는 계속 참여하여 활동합니다. 이날 참석한 가장 어린 학생은 16살의 고보 1학년 정우채였습니다. 따라서 초기 성진회 창립 멤버는 국순엽을 포함하여 총 16명입니 다. 출신 지역 역시 광주, 나주, 완도를 비롯하여 제주, 충북 등 다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