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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대부분인 2등칸에서 승객들은 “센징 주제에 건방지다” “센징 학생들이 잘못했다”고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학생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게 됩니다. 11월 1일에는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확대됩니다. 후쿠다가 전날의 상황을 자신에 게 유리하게 학교에 보고하였고, 광주중학교에서는 광주고보에 이 사실을 알립니 다. 박준채는 교감에게 불려가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어야 했습니다. 오 후 4시 30분 통학열차가 광주역을 출발할 무렵,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유도교사의 인솔 아래 광주고보생들을 쫓아옵니다. 일본인 학생들의 손에는 야구 방망이, 죽창, 죽검 등이 들려 있었습니다. 두 차례나 한국인 학생들에게 구타당하여 일본인의 자 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차 통학생이 아닌 학생까지 포함된 30여명의 일본인 학생들은 “어제는 우리 학교 생도가 당했으니 오늘은 우리가 복수 한다.”고 통학열차로 몰려들었습니다. 한국인 통학생 20여 명도 기찻길을 마주하고 결전에 대비하였습니다. 유도 교사는 후쿠다를 앞세워 박준채를 찾아 나서기도 하 였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두 학교 교사와 경찰의 제지 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이틀간의 일에 대한 경과보고를 듣고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학교 강당에 집결하였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자 오쾌일의 제안으 로 일단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교사들도 충돌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 록 하기 위해 열차에 같이 승차하여 학생들을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분위기는 매우 살벌해졌습니다. 한국인 학생들이나 일본인 학생들이 나 모두 여러 명씩 짝을 지어 다녔습니다. 불안한 상황에서도 11월 2일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충돌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분위 기는 점차 통학생들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광주 지역 전체 한·일 학생들의 집단 충 돌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11·3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주역 사건’은 무엇인가요?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