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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1·3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주역 사건’은 무엇인가요?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9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 45분에 광주역을 출 발한 열차가 5시 35분 나주역에 도착합니다. 통학생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기차에서 내립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광주중학교 학생인 후쿠 다, 다나카, 스에요시가 광주여고보(현 전남여자고등 학교)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이금자)를 밀치는 일 이 벌어집니다. 이들은 기차 안에서부터 여학생들을 희롱하였는데,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계속된 것입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인 박준채가 후쿠다를 꾸짖습니다.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후쿠다도 물러 서지 않고 “뭐라고? 센징노 쿠세니”라고 대꾸합니다. ‘센징노 쿠세니’는 ‘조선인 주 제에’라는 말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얕잡아 보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박준 채는 후쿠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서로 간에 격투가 벌어집니다. 훨씬 적은 수였지만 울분과 악에 받쳐 있던 한국인 학생들의 사기가 일본 학생들을 압도하였습 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나주 역전 파출소 순사 모리타가 달려와 싸움은 중단됩니 다. 분이 풀리지 않은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내일은 학교를 쉬지 말라”고 말하자, 모 리타 순사가 박준채의 따귀를 때립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통학열차 안에서 다시 다툼이 일어납니다. 전날 나주역에서 의 충돌이 통학열차 안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박준채를 비롯한 3 ~4명의 고보생들 이 의도적으로 광주중학생들의 칸에 올라탔습니다. 박준채는 후쿠다에게 전날에 대 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후쿠다가 거부하자 다시 격투를 벌입니다. 광주중학생들이 대부분인 칸에 탑승하여 격투를 벌일 정도로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을 압도 했습니다. 이를 본 차장이 박준채와 후쿠다를 2등칸으로 끌고 갔습니다. 일본인들이 이광춘과 박기옥(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