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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학교는 학생들이 제출한 진정서의 내용을 검토하기는커녕 긴급 직원회의를 열어 27명을 주동자로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에 처합니다. 광주고보의 총 학생 수 500여 명 가운데 참여하지 않은 1학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이 처벌을 받은 셈입니다. 학생들의 투쟁의지는 더욱 강해집니다. 7월 9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재성이 급히 귀국합니다. 그날 밤 장재성은 성진회 회원이었던 최규창, 임주홍, 정우채 등을 모아 맹휴투쟁의 방향을 정합니다. 단순히 학교문제에 그치지 말고 민족적 항일 투쟁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튿날인 7월 10일, 학생대표들은 최규창의 하숙집에 모여 맹휴중앙본부를 설치 하고 학부모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습니 다. 맹휴중앙본부가 주도하면서 학생들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7월 25일에는 도쿄 광주고보 졸업생 단체의 성명서와 도쿄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보낸 항의문이 학교에 도착하여 투쟁 분위기를 북돋았습니다. 학교는 맹휴가 일어나자 300명이 넘는 학생을 퇴학·무기 정학시켜 버립니다. 또 한 경찰도 맹휴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리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8월 25일 까지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을 요구합니다. 이 에 대해 맹휴중앙본부는 학교와 경찰의 압력에 동요를 보이는 학생들에게 “중앙본 부 통신경고문”을 보내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광주고보의 맹휴는 9월 17일 학생들의 등교로 4개월 만에 막을 내립니다. 주동자 8명은 재판에 회부하여 징역 10월에서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맹휴 투쟁의 계기가 되었던 이경채는 별도의 재판에서 징역 1년 6 개월을 받았습니다. 실형을 받지 않은 39명의 퇴학자를 포함하여 모두 54명의 희생 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광주 학생들은 ‘이경채 사건’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나요?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