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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광주 지역 맹휴투쟁의 서막, 야구시합 사건은 무엇인가요? 광주고보의 맹휴 횟수는 4번으로 전국 중등학교 가운데 5번째로 많았습니다. 그만 큼 학생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광주고보의 최초의 맹휴투쟁은 1923년 1월 일본인 교사가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 하자 이에 학생들이 반발하면서 맹휴투쟁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맹휴 투쟁이자 광주 지역의 본격적인 맹휴투쟁은 1924년 6월에 일어납니 다. 광주고보와 광주의 일본인 선발팀 사이의 야구경기가 발단이 됩니다. 당시 야구 시합은 박빙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투수전이었습니다. 8회가 끝날 때까지 광주고보 가 1:0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9회 초, 일본인 선발팀의 마지막 공격이 시 작됩니다.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다 아웃을 당하자 선수들 간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 때 일본팀 응원단장 안도(安東)가 달려들어 판정에 대한 불만으로 심판에게 행패 를 부립니다. 또한 광주고보 선수를 잡아당기며 모욕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광주감 옥 의사인 안도는 평소에도 한국인을 무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광주고보 학생들 은 안도에 대해 불만이 컸습니다. 안도의 행패에 화가 난 광주고보 학생들이 안도를 구타하면서 한·일 학생들 사이의 집단 패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싸움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지만, 광주고보 선수들만 경찰에 잡혀갑니다. 경찰에 학생 조사를 의뢰한 사람은 바로 광주고보 교장 구리노였습니다. 분노한 400여 명 의 광주고보 학생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선수들의 석방을 요구합니다. 학생들은 다 음날 풀려나지만 교장은 400명에게 무기정학을 내립니다. 이에 학생들은 교장 사퇴 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맹휴를 단행하게 됩니다. 이 맹휴투쟁은 9월이 되어서 야 수습되지만, 맹휴투쟁을 주도한 고광우·국채덕·최헌주·지창수 등이 퇴학을 당합 니다.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