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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전라도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침탈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2 나주의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 11·3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 주 지역은 드넓은 평야지대입니다. 하지 만 농민들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지주가 1.6%, 자작농이 5.4%, 자소작 농이 40%, 소작농이 53%였습니다. 몇 몇 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 구로즈미 이타로의 가옥_나주 영산포 던 것입니다. 또한 나주는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진출 해 있었습니다. 1930년 당시 나주의 조선인 인구는 16만 1,822명, 일본인 인구 는 3,788명이었습니다. 조선인 소유 토지는 약 5,127만 평, 일본인 소유 토지 는 3,732만 평으로, 1인당 소유 토지는 조선인이 310여 평인 데 비하여 일본인은 10,000여 평이었습니다. 영산포구가 있는 영산면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했습니다. 조선인들의 토지보다 오히려 일본인들의 토지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한 가구당 소유 토지는 조선인 이 1,800평인데 반하여 일본인은 51,500평에 달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차이입 니다. 이 당시 나주 지역의 대표적인 지주는 일본인 구로즈미 이타로였습니다. 구로즈미 는 동척 영산포 지점을 등에 업고 나주 지역의 경제를 쥐락펴락하였습니다. 그의 땅 을 밟지 않고는 이 지역을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330만평의 토지 는 전남대학교보다 11배가 넘습니다. 그는 대지주로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영산 포 우편소장을 거쳐, 조선승입(가마니)주식회사 사장, 영산포운수창고회사 전무를 맡았습니다. 또한 조선전기주식회사 사장, 전남농회 부회장 등을 거치며 수많은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