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age

13 40문 40답으로 알아보는 11·3 학생독립운동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들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반응을 기다리며 집회를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광주는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화를 외치며 집회를 이어갑니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15 정·부통령 선거 당일 가장 먼저 부 정선거에 저항하며 시위행진을 시작했던 곳이 광주 금남로입니다. 왜 광주는 침묵 하지 않고 떨쳐 일어났을까요?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남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수원과 강화도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일본이 남쪽으 로 내려와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김천일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들어갔다가 아들과 함께 순국하게 됩니다. 광주의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둘째 아들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국합니다. 큰아들 고종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화순 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경회와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합 니다. 김덕령 또한 전국 의병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도원수 권율이 이끌 었던 관군의 주력 부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끈 수군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중심이었습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외세·반봉건을 외치면서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라도 사람들이 이끌었습니다. 관 군에게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던 정읍 황토현 전투, 조선 최정예 중앙군을 물리쳤던 장성 황룡촌 전투와 전주성 점령, 일본군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하였던 공주 우금치 전투, 동학농민운동 최후의 격전지였던 장흥 석대들 전투 역시 전라도 사람들이 중 심이었습니다. 11·3 학생독립운동은 왜 전라도에서 시작되었을까요? 11·3 학생독립운동의 배경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