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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월31일 금요일 6 (제157호) 관향조 종친회 순천박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븡고려 시대 문관의 품계 정1품)으로 승주군(昇州君)에 피봉(被奉) 되고 사후(死後)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 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온 휘 영규(英規, 후백제 견훤의 사위 로 태조 왕건이 877년생, 장인 견훤이 867년생, 태조께서 큰 형님으로 모셨으며 시조공의 장녀가 태조의 17비인 동산원 부인으로 시조공은 870년 초 출생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 다.)공(公)을득관조로하고있다. 순천박씨 대동보인 을사보(乙巳譜,1785년간행)에는 시조 공 후 8븡9세 실전되었고, 고려 정승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휘 난봉(蘭鳳)을 중흥조로 하였으나 다시 數世가 실전(失傳) 되어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역임하신 휘 숙정(淑貞, 號 竹溪)을 기(起) 1세(世, 中祖)로 하여 계대(繼代)되어 지 금에이른다. 그리고 5세(世)에 이르러 문숙공파(文肅公派, 휘 석명), 군 수공파(郡守公派,휘 순명),문목공파(文穆公派,휘 안명),의 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휘 류성), 진사공파(進士公派, 휘 두성), 승지공파(承旨公派, 휘 수년), 경력공파(經歷公派, 휘 의번), 생원공파(生員公派, 휘 배원), 제주목사공파(濟州牧 使公派,휘 증원),판관공파(判官公派, 휘 견원),감사공파(監 司公派,휘 성),충정공파(忠正公派, 휘 팽년), 교리공파(校理 公派, 휘 인년),수찬공파(修撰公派, 휘 기년), 박사공파(博士 公派, 휘 대년),검열공파(檢閱公派, 휘 영년), 전직공파(殿直 公派, 휘 사제),인의공파(引儀公派, 휘 득금), 부위공파(副尉 公派, 휘 성금) 등 19지파로 분파되어 지난 2015년 인구조사 기준 105,208명으로 남자 53,034명, 여자 52,174명이 전국에 분포되어있어이번호에는한양에서 조카의훈업(勳業)이성 만(盛滿)함을 보고 장차 집안에 위화가 올 것이라 예견하고 1 506년 9월2일 중종반정 직전에 나주(羅州)로 낙남(落南)하여 정착한문숙공후(后)돈녕공파(敦寧公派)에 대해알아본다. 순천박씨 돈녕공파는 중시조 휘 숙정(淑貞)의 7世 가정대 부(嘉靖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휘(諱) 숙선(叔 善)을파조(派祖)로하고 있다. 돈녕공은 1469년(예종1년) 4월에 무과에 장원으로 등과하 니, 예종은 기뻐하여 行 대호군(大護軍)을 제수하였고, 왕실 의대군들과도항상척의(戚誼)가돈후(敦厚)하였다. 중종조때벼슬과권세를버리고나주로내려와은거하면서 자손들에게 ‘권세와 관직을 탐하지 말고 충효와 도덕 문학에 힘쓰라’유명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븡고려 시대 문관의 품계 정1품)으로 승주군(昇州君)에 피봉(被奉) 되고 사후(死後)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 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온 삼중대광공 휘 영규(英規, 후백제 견훤의사위)공(公)을득관조로하고있다. 순천박씨중앙종친회에서는 2016년4월1일 븮삼중대광공 박 영규와 순천해룡산성 재조명 학술대회븯를 순천대학교 박물관 에서 개최하고 순천박씨의 숙원사업으로 해룡산성의 시조공 사당인 해룡산사 복원을 위하여 순천시청과 협의하고 있으며 순천의묘역관리는돈녕공파에서하고있다. 그러나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었고, 고려 정승 평양군 (平陽君)에 봉해진 휘 난봉(蘭鳳)을 중흥조로 하였으나 다시 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 貞, 號 竹溪)을 기(起) 1세(世, 中祖)로 하여 계대(繼代)되어 지금에이른다. 중흥조 휘 난봉 이후 대제학공 휘 숙정(淑 貞)에 이르기까지 세수(世數) 실전에 대해 먼저 중흥조와 세수 실전에 대해 고 찰해본다. 중흥조 휘 난봉(蘭鳳)은 고려 정승(政丞)이며, 평양군(平 陽君)을 봉작(封爵) 받았으며, 별세한 뒤 인제산신(麟蹄山 神)이 되었다.(여지승람) 순천박씨 을사보(1785년 발행)에 의하면 묘는 순천부 서쪽 3리의 지점인 향교 좌편 분죽 밭에 있는데 봉역(封域)이 지금도 완연하며 영험이 있다하나 다만 고 로 (故 老 )들 의 전 설 일 뿐 비 지 (碑 誌 ) 와 같 은 증 거 할 만 한 자취가 없으므로 오래도록 수호하지 못하였고 그 산 이름을 난봉산이라부르는데공의휘자와동음(同音)이요공을이산 에 장사하였으므로 생긴 이름일 것이다. 1694년(숙종 20)에 후손 치도(致道)가 위원(渭原)의 적소(謫所)에 있을 때 부인 이씨에게 기이한 꿈(夢兆)을 꿨다고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당 시 읍재(邑宰) 박두세(朴斗世)와 상의하여 인제산 위에 신사 (神祀)를 건립하였으니 즉 지금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평양 구지에기록되어있다. 1858(철종9)년에 후손 문현(文鉉)이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 호남의 족친 해승(海升) 등이 봉축(封築)하여 수호하기를 청 하므로 모두 이의가 없고 또한 사적이 강남악부(江南樂府)에 실려 있어서 드디어 여러 종친들이 힘을 합하여 묘를 봉축했 다. 그러나 비지(碑誌)같은 믿을만한 증거가 없어서 장차 단 (壇)을 모아 비석을 세워 후세에 전하려 했으나 곧바로 전임 (轉任)되어이루지못하였다. 그 후 1910년에 진사 해승(海升)과 삼종손(三從孫) 노정 (魯禎)이 제종에게 순의(詢議)하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금 양(禁養)을정하였다.묘소는순천시금곡동산13번지추원단 (追遠壇) 술좌(戌座)이다. 지금 순천 주민들이 그 산을 박난 봉산 그 묘를 박장군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예를 숭 상했지않나생각한다. [을사보 이하 세수(世數) 실전(失傳) - 을사보(1785)에 말하 기를 고려사 백관지를 상고하건데 충렬왕 34무신(戊申,1308) 년은충선왕의원년인데시중(侍中)중찬(中贊)등의관작을정 승(政丞)으로 고치고 이성(異性) 봉군도 이때부터이라니 정승 공(휘 蘭鳳)의세대가 고려말기로써 대제학공(휘 숙정)과의서 로떨어진거리가멀지않은것같다.임술보(1862)에말하기를 고려사를 상고하건데 시중을 정승으로 고치고 이성에게도 봉 군한 것은 충렬왕 34년 무신(1308)년인즉 정승공(휘 난봉)은 마땅이 고려말기 사람일 것이고 대제학공이 충숙왕 12년(을 축, 1325)에 관동존부사(關東存撫使)가 되셨으니 무신년(130 8)과서로떨어진시기가불과19년이고또한대제학공의증손 휘 가흥(可興)공 부인 정씨가 충목왕 병술(丙戌,1346년)에 출 생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공의생년이 또한 병술(1346)안 팎을지내지 않을 것이니 병술년에서부터거슬러올라가무신 (1308)년까지가 불과 39년이고 휘 가흥 공이 대제학공의증손 이 된다고 하였으니 정승공이 비록 오래수(壽)하였다 해도 정 승 되고 봉군된 것은 반드시 충선왕과 충숙왕 때일 것이니 대 제학공이 마땅히 아들 항열일 것이고 촉대(促代)가 되더라도 손항(孫行)쯤 될터인즉 두어 대를 실전하지 않았나 짐작되며 대광공(휘 영규)으로부터 정승공(휘 난봉)까지는 아마도 8~9 세는지냈으리라] 중시조(1世) 휘 숙정(淑貞)은 고려 보문각대제학이며, 공 이 풍류와 표치가 세상에 뛰어나서 이제현, 안축 등 제현(諸 賢)들과 친교가 있었다. 충숙왕 1년(1314)에 경상도제찰사가 되었고, 충숙왕 12(1325)년 무렵에 국자감 좨주로 전임되어 유생들을훈도하였다.다시1326년 관동존무사가되었고고성 의 사선정(四仙亭)과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및 울진의 취운 루(翠雲褸:사라호 태풍으로 소실))는 모두 공이 창건한 것으 로 이제현, 안축의 기문과 이가정(李稼亭) 한강 정구 선생이 저술한서천부원군정곤수의행장에나타나있다. 부인 여흥민씨 사이에 아들 원룡(元龍, 2세)을 두었으니 고 려겸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郞)이다. 3世 휘 천상(원룡의 아들)은 공민왕 조정에 무과로 도첨의 시중(都僉議侍中)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이다. 고려말기 창왕 1년의 역성혁명기에 신흥 권신들이 무구(誣構)한 영흥 군 왕환(永興君 王環)의 진위지변(眞僞之辨) 사건에 내세운 사람을 부인(否認)하다가 무고죄에 좌죄(坐罪)되었고, 공양 왕 2년에 권신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이초(彛初)의 옥(獄)을 탈출한 김종연을 숨겨주다가 발각되었으나 정몽주 선생의 상소로 모면하고 조선이 개국되어 이태조의 징배(徵 拜)를 불복하다가 재산을 몰수당하였으나 태조 7(1397)년에 사유(赦宥)되었다. 4세(世) 휘 가흥(可興, 휘 천상의 아들)의 자(字)는 안중 (安中),충목왕 3년(1347)에 출생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 政府右議政)에이르고시호는정후(靖厚)이다. 공은 우왕 4년(1378)32세로 경상도안렴사(조선조 관찰사) 로 발탁되고 예의판서(예조)에 오르고 전법판서(형조)와 군 부판서(병조)의 화직(華職)을 두루 거치고 고려말 역성혁명 기간에는 훈구원신들이 신승 권신들의 무함(誣陷)을 당하여 춘천으로 유배되고 영흥군 왕환의 지위지변에서 이를 부인하 다가 유배되었고,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정 포은 선생의 상소로 해배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문숙공이 좌명한 훈공으로 평양군에 봉하여 정헌대 부 겸교의정부우참찬으로 높이고 망배(亡配) 정씨부인에게 는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을추중하였다. 공은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특별히 융숭한 대우로 판 공안부사, 개성유후사, 유후(留后)와 검교의정부좌참찬을 제 수하였다. 세종도 겸교의정부우의정으로 높이어 치사하였고, 세종9년(1427)8월 21일에 고종명하니수(壽)81이다. 세종이 애석해하여 3일간 철조(輟朝)하여 예장하고 정후 (靖厚, 令樂終命靖 思慮不爽厚)라 시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 내어치제하였다.그제문에“늙고어진신하로서일찍부터명 망이 높았나니 슬퍼함과 영화롭게 하는 전례를 마땅히 시종 토록 융숭히 할 것이다.경(卿)은 순후(醇厚)하여 부화(浮華) 하지 않았으며 침정(沈靜)하여지조를 지키었다.높은 벼슬에 올라서 드디어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매양 글하는 선비를 쫓아 사귀었고 항상 시(詩) 짓기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다. 벼 슬하며 처리함에는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았고, 몸가짐과 사 람을 접함에는 오로지 사랑과 은혜 베풀기에 힘썼다. 오로지 소고(昭考,태종을 가르킴)께서 포상하시어 은총을 두터이하 셨고,과인(寡人)도 믿고 중히 여기어 높은 벼슬을 주어 옛 덕 을 빛나게 하였다. 진실로 누대의 원로이며 백성이 우러러보 는 바이다. 어찌하여 하늘이 남겨 두지 아니하여 갑자기 슬픔 을 주었는고, 이에 전례를 명하여 소유(素惟)에 나아가 치전 (致奠)하노라. 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진실로 이수(理數)에 달렸거니와 은례(恩禮)를 더하는 것이야 어찌 유명(幽明)이 하하여다르리요”하였다. 5세 휘 석명(錫命)은 고려 공민왕19(1370)년에 태어나 호 (號)는 이헌(視軒)이고 태종조 명신이다. 천부(天賦)의 자질 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의표(儀表)가 준수하며 지혜롭고 사 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에 밝았을 뿐 만 아니라 강기(强氣) 하 였다.우왕11년(1385)가을에 16세의 미관으로 문과에 급제하 고소년시절에는잠자(潛邸)의이방원과한이불을덮고자다 가 하루는 꿈에 황룡이 곁에 있음을 보고 깨어 돌아보니 이방 원이었다. 이로부터 기이하게 여겨 우의(友誼)를 돈독하였으 며, 방원(태종)이 왕위에 올라서는 총행(寵幸)함이 융극(隆 極)하였다. 승지가 되었을 때 왕이 ‘누가 경(卿)을 대신할 만 한 사람인가’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조신(朝臣) 중에는 가 (可)한 사람이 없으나 오직 승추부사 황희가 진실로 추천할 만한 사람입니다.’고 대답하니 왕이 채용하여 얼마 되지 않아 공을 대신하여 승지(承旨)가 되고 마침내 명상(名相)이 되니 세상이‘공은사람을알아보는혜안(慧眼)이있다.’고하였다. 처음 공양왕조에서 22세로 우부대언에 이어 병조판서에 발 탁되고 조선이 개국함에 공양왕의 동모제(同母弟)인 경희공 (景禧公)왕우(王瑀)의 사위인 까닭에 8년간을 침폐(沈廢)하 고 있을 때 정종 1년(1399)에 왕세자 태종이 좌산기상시(左散 騎常侍, 左承旨)로 징배(徵拜)하여 안주목사를 거치고, 태종 이왕위에 오를 때국새(國璽)를받들어익재(翊載)한 훈공으 로 좌명공신의 반열에 올라 평양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세 계최초의 동활자 계미자(癸未字 1403년)를 창시하는 등 6년 간 왕명을 도와 왕권의 확립과 왕정혁신을 주도하며 조금도 결실(缺失)이없었고태종은끝까지믿고의지하며전후로비 할 사람이 없으므로 개국 이래 처음으로 자급을 뛰어 자의정 부사에 판육조사로 판순금사사와 사헌부대사헌을 겸직하여 의정부와 군국기무를 참장( 핫掌)하고 전라도 제주도체찰사 로 남행하다 병을 얻었는데 공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접한 태 종이 어의(御醫)를 보냈으나 태종6(1406)년 7월 13일에 김제 역(연기군 전의면 대곡리)에이르러순직하였다.태종은 특심 (特甚)히 통도(痛悼)하며 ‘의리(義理)로는 군신지간이나 정 으로는 부자와 같았다.이제는 공이 갔으니 하루 세 번 만나던 후의(厚誼)도 베풀 수 없게 되었으니 슬프다. 경의 늙으신 아 버지는 내가 대신하여 효도할 것이고 어린 자식들은 내가 은 전을 내릴 것이다.’하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助功 臣)의호를내리고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을더하며문숙(文 肅)의 시호를 내리고 철조(輟朝)하였으며,미두 120석과 백지 200권을 내려 예장을 명하고 예관을 소유에 보내 치제하였으 며,문숙공파파조가되었다. 공은 아들 거비(去非), 거완(去頑), 거소(去疎) 등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휘 거비는 아들 휘 송수에 이르러 무후이고,둘 째 휘 거완은 중추부사이고, 셋째 휘 거소는 봉열대부 부지돈 녕부사이며 세조 정해년(1467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 되었 고,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증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평원군에 봉군되었다. 아들 4형 제를 두었는데 장자는 휘 중선(仲善)이고,차자는 휘 숙선(叔 善),3자는계선(季善)이고,4자는승선(承善)이다. 장자휘중선은무과에올라숭록대부판돈녕부사에겸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평양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소양(昭襄) 이다, 그의 아들 원종(元宗)은 1486년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 이조참의 경기강원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중종 원년에 정국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평 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무열(武烈) 이였으나 충열(忠 烈)로바뀌었다. 차자 휘 숙선(叔善, 7世)은 가정대부 동지돈녕부사이며, 15 15년 3월에 졸하였다.1507년 나주로 낙남하여 후손들이 호남 지방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돈녕공파의 파조가 된다. 뱚파조별 약사 순천박씨돈녕공파(敦寧公派) 순천해룡산성지(址) 정승공묘역(전남순천) 사진오른쪽삼중대광공(휘영규). 대제학공(휘숙 정)단소 뱚돈녕공파연원 뱚선원세계 뱚▶7면으로 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