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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월31일 금요일 4 (제157호) 관향조 종친회 영추재(永追齋)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장전초등학 교 인근 장전동 쌍용 아파트 뒤편에 있다. 죽산박씨 총제공파 인묵재공 후 의재공(毅齋公) 휘(諱) 준(浚)을 비롯 선세(先 世)8대(代)9위(位)의향화(香火)를받드는곳이다. 1980년대에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588-1번지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곳에 구서동 쌍용 예가 아파트가 들어서 면서 2006년 11월 18일 영추재는 지금의 위치로 다시 건립하 여 이전하였다.2013년 9월 4일에 요사채인 예희당(禮喜堂)을 건립하였다. 재실의 문은 솟을대문의 형식인 선덕문(宣德門)이다.이 문 을 들어서면 왼쪽에 요사채인 팔작지붕의 예희당이 있다. 예 희당은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로, 전통 목조 양 식의 초익궁 보머리 형식이다. 그 안쪽으로 계단에 올라서면 재실인 영추재가 있다.영추재는 팔작지붕의 정면 3칸,측면 3 칸 건물로, 전통 목조 양식의 갖은 주삼포 형식이다. 대지 면 적은총957㎡이다. 배향위영추재뒤편에선세(先世)설단이있다. 설단 정중앙 부분은 소목지서법에 따라 의재공 휘 준을 수 위로왼쪽에는박상운(朴尙雲),오른쪽에박문재(朴文在),바 로 앞줄에는 이서위상법에 의해 박희곤(朴希坤), 박경일(朴 慶一), 박내종(朴乃淙), 박내연(朴乃演), 박민석(朴敏碩), 박 성홍(朴性洪)의 단소가 있어 매년 음력 10월 중정일 다음날에 묘사를한다. 의재공의 묘소는 소산(금단곡) 자좌(子坐)이나 1974년 파 묘 후 화장(火葬)하여 구서동 563번지에 설단하여 향화를 받 들어 오다 1995년 영추재 구지(구서동 563)로 옮겼다가 다시 도시개발에편입되면서현위치로옮기게되었다.그리고의재 공의 아드님 휘 문재(文在) 공(公) 이하 선세 묘역도 각지에 산재해 있어 2014년까지 각각 화장 후 설단으로 모셨다.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경명왕(景明王)의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 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 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 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 다.고려 때의 죽주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및 안성시를 말하고 있다. 죽산박씨는 죽주백(竹州伯, 휘 기오)의 시호(諡號)는 충정 (忠貞)으로 공(公)이 아들 휘 술(述)과 함께 고려개국에 공헌 한 이후 대대로 공경(公卿)이 배출되었다. 5대손 휘 영후(永 候) 공은 은청광록대부 상서판삼사사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정유와 차남 정혁에 이르러 각각 장남은 충질공파(忠質 公派 諱 挺찮),차남은 소경공파(少卿公派 諱 挺奕)로 분파되 었다. 소경공의 현손에 이르러 다시 판서공파(휘 暉)와 찬성공파 (휘 暄)로 판서공파에서는 문광공파 태복경공파로 문광공파 에서는 문강공파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로, 태복경공 파에서는 목사공파, 총제공파, 문강공파에서는 직제학공파, 연흥군파 좌랑공파 전서공파 대사헌공파로 분파되었다. 연흥 군파에서문헌공파,문정공파가분파되었다. 총제공(摠制公)의 휘는 덕공(德公)으로 자헌대부도총제를 지내고 고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광릉산(光陵山)에 은둔 하였는데, 후일 조선 정조(正祖) 때 개성 두문동(杜門洞) 표 절사(表節祠)에모셔졌다. 충제공(휘 덕공)의 아들 휘 곤(坤)은 가선대부 예조참판, 손자 여달(如達)은 봉직랑, 증손 휘 준산(峻山)은 중훈대부 수안군수를 지내고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겸문(兼文) 은 통훈대부 내자시 판관, 차자 겸무(兼武) 회양부사, 3자 겸 인(兼仁)은 장흥부사, 4자 겸의(兼義)는 장사랑으로 기자전 참봉,5자 겸례(兼禮)는 호장으로 증 이조참판으로 각각 관로 (官路)에 있었다. 셋째인 장흥부사 겸인(兼仁)의 장자 휘 치(熾)는 진사 차자 휘 수(燧) 진사로 중종조 기묘사화를 피해 경북 성주로 가게 되었고현손인묵재(忍默齋)휘 천추(天樞)는 어릴적 성주에 서 자랐다. 이후 성주에서 동래로 이거하여 세거지로 형성 되 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래성 전투에서 분전 하였으며, 성이 함락당한 후에는 의병을 일으켜 7년 전쟁 내 내 적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백성을 구출하면서 적의 수송로 를 차단하며 혁혁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난(亂)이 끝난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면서 고을의 양속창달 (良俗暢達)에 온힘을다하였다. 인묵재공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휘 대수(大壽)차 자 휘 대 회 (大 檜 ), 삼 자 휘 대 춘 (大 春 )으 로 차 자 휘 대 회 (大 檜) 공의 아들 휘 준(浚)이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의재공 (毅齋公) 이 구서동에서 태어나 이후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 다. 영추재는부산인근의재실중에서전통적인형태를갖추고 지금까지 50여 호가 세거지를 이루며 향사를 하는 대표적인 재실이다. 그리고재실의표준을제시하고있어부산의 다른문중에서 답사하여재실건축의모범을삼는경우가많다. 2013년 요사채인 예희당을 건립함에있어정성을다하여조 상을 기리고 그윽이 하여 내적완성을 추구 하며 후손들은 다 짐한다. △조상을 섬김에 있어 마음을 다하고 전통을 소중히 하여 문중의 긍지글 드높인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으 뜸가는덕목으로하여자녀를훈육한다.△윗사람을공경하고 연장자를 존중하여 위계와 질서를 바로 세운다. △ 상호간에 는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인정하고 반목하지 아니한다. △오 늘을 사는 우리는 옛것을 잘 보존하고 현재를 알차게 하여 다 음세대의밝은미래를지향한다. 물질문명은 발달되었으나 이면에 청소년들의 인성은 무너 져 내리고 있는 때에 후손들의 다짐은 유학의 산실이기도 한 영추재를통해동화(同化)되는듯하다. 도심 속의 웅장한 자태와 낭랑한 축문 소리는 길손을 붙잡 고 선(善)하고 의(義)로운 고운 심성을 심어주기에 충분하기 에영추재주련글을옮겨본다. 景仰先徽築是齋(경앙선휘축시재)선조의 아름답고 훌륭한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보며 이 재실을 지으니./ 宗支合力衆謨 偕(종지합력중모해)종손지손함께힘을모아지혜를다하고 / 豆 븅誠껐終如始(두변성곤종여시) 제례에 정성을 다 하여 처음과 끝이 같아야하며/ 技技承承永不乘(계계승승영불승) 가벼이하지말고잘받들어오래토록이어갈지어다. 뱚재실탐방 죽산박씨영추재 (부산광역시금정구장전동88-11번지) 영추재전경 뱚건립시기및형태 영추재본당 예희당 선덕문 단소(壇所) 뱚죽산박씨총제공파연원 뱚의재공종중연원 뱚의의와평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