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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월31일 금요일 10 (제157호) 종합 동욱현종이자녀들과손자들을위해직접만든가승을보이며설명하고있다.가승은순수한문으로외국에 나가있는자녀들이한문과한글을잊지않고배웠으면하는마음에서만들었다고한다.동욱현종의아들장 환박사(피부과전문의)는한학에조예가깊어한시와서예부문에서일찌감치명성을떨치고있다. 동욱 현종은 우 리나이로 올해 97 세가 된다. 경북 영덕에서 임란의 병장 무의공(휘 의장)의 후예로 1 924년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의 후 예가 그렇듯 아버 지(휘 희락)께서 영덕지역 3·1만세운동의 주역이라 유 년시절부터어렵게살아왔다고한다. 동욱 현종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거 운 사람’이다. 말수가 적고 풍기는 기운 또한 강해서 평소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만세운동부터 신사참배거부까지는 아버 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보다 지인들과 함 께 이야기하는 것을 귀동냥으로 더 많이 들었을 정도다.하지만 아버지의 행적과 삶을 존경하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 전 까 지 겪 어야 했 던 모 진 수 모를 기억 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신앙을 가진후 영해지방에 최초의 교회(원황교 회)를 설립하고 민중계몽운동에도 전력 했었다”고전한다. 이어 “우리나라 역사상 남녀노소, 지 역 , 신 분 의 차 별 없 이 하 나 의 목 적 을 이 룩하기 위하여 백도에서 한라까지 하나 가 되었던 3·1 운동이었는데 지금의 우 리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우리 모두 생각해야보야야할일이다.”고말한다. 동욱 회장은 조선정치학관(현 건국 대학교)을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공채 에 합격해 교직원으로 근무했다. 1954 년 개교한 개명기독대학은 초창기 체계 로 현직제로는 법인사무국장으로 재직 하다가1984년8월말정년퇴직하였다. 이에 지난 해 5월 창 립 120주년 을 맞 아 성서캠퍼스 부지 조성과 대학기반조성 공 로를 인정 공 로상 을 수 상 받았 다. 재 직 중1979년12월5~7일일본의왕족대학인 학습원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거 행하였던 행사에 초빙강사로 ‘한국사립 학교법및사학제도’에대한일본어특강 으로 그들에게 한국 사학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데에상당한기여를한바있다. 1984년 9월 정년퇴직과 함께 광복회 대구지부에서 활동했다.사무국장과 광 복회 대구경북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많 은 족적을 남겼다. 사무실이 없는 광복 회의 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조양회관을 광복회 사무실 로사용하는데주도적역할을했다. 조양회관은 1922년 달성공원에 대구 지역 청년의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백두 산에서 재목을 채취하여 지은 우리 민족 의상징성있는건물이다.현재망우당공 원으로 이건 되어 1987.2.27.광복회에서 관리하고 있어 광복회관이라고도 불린 다. 이후 조양회관에는 대구경북지역 애 국지사의 자료를 전시한 역사관으로 사 용되 고 있어 청소 년들 의 애국 심 고 취와 시민들의 정신함양에 크게 일조하고 있 다. 또 신암선열묘지 건립으로 독립유공 자 52기를 안장 하는 등 광 복에 몸 바친 선열들을예우하는데크게기여했다. 동욱 현종은 지난해 ‘3·1 만세운동 10 0주년’을 맞이한 소회를 밝혔다.20년이 넘도록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그는 3·1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한국이 일 본의 통치하에 조용히 있었으면 독립과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 평화적인 3·1 운동이 세계 여론 을 흔들었고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카이로 선언에서 한민족을 반드시 독립시켜줘 야 한다고 보장받은 것도 3·1운동이 있 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받은 판결문을 비롯 관련 서류를 조용히 내밀었다. 한자로 적힌 판결문에는 영해지방 만세운동으 로 일본인 재산 피해가 발생, 1377원을 배상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3·1 운동 당시 경찰주재소를 부순 대가였 다. 박 씨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상상도 못 한다.당시 소 한 마 리가 5원이었다”며 “가산이 몰수당했 고 압류딱지가 붙었다. 집안사람 모두 에게 피해가 돌아갔지만 지역의 여러 문중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결할 수 있 었다는이야기를들었다”고전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산 것에 대해 학식과 애국심, 그리고 신앙 을 간직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러 한 마음가짐이 3·1 운동부터 신사참배 거부까지 굳건한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80년 전 들었던 이야기다.신앙을 가지면서 고충도 많았 다.“아버지가 신앙을 가지면서 문중 집 안에서 거의 배척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며 “당시 양반 집안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 기독교도를동물보 다못한취급을했다”고전했다. 하지만 영해읍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당시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이 있을 때 였는데,아버지가나서서모두를설득해3· 1운동을일으킬수있었다”경찰의힘으로 는진압할수없어서대구수비대(군인)가 출동하기까지 치열하였던 영해 만세운동 은당시한강이남에서는 가장치열하였던 사건이었다.이렇게된데는선각자적인당 시의 기독교인들의 애국심과 나라가 없어 지면 교회도 없어진다는신앙 때문이었을 것이라 하였다.징역 4년 판결에 의한 옥고 를 치르고 나온 후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 다. 동네 사람들은 박희락을 비난했다. 독 립할 수 있다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는데, 함께 한 이들이 죽거나 매를 맞는 등 고통 만 겪었다는 것이다. 동욱 현종은 어린 나 이에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그는 “옥에 서 나온 후에 박대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운영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았다”며 “아버지에게 감히 이야기를 못 했지만,돈 도 없고 우리 집도 어려운데 남을 돕는 그 모습이 어린 시절엔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 다”고 회상했다. 동욱 현종은 “우리는 3· 1운동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며 “해 방이 안 됐으면 우리 역사도, 우리 언어 도,우리 민족도 사라졌을 것이다”고강 조했다.이어 “이번 100주년은 이러한 역 사 를 다 시 한 번 깊 게 되 새 기 는 해 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며 “후세에도 3· 1 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기렸으면좋겠다”고덧붙였다. 동욱현종은 투철한 애국애족의 정신 으로 지부회관 마련으로 대한광복회장 의 공로패에 이어 1995년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사회분야 발전에 이바지한 공 로로국민포장을수상하기도했다. 동욱 현종은 아직도 옛날 봉건주의 사상과 유교정신에 입각한 우리 종중문 화도 이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학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시류에따라야한다고강조한다. 그러면서 한 꾸러미의 책을 내민다. 배 트남전쟁에서포로가되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성공한조카박정환소위가원고를 제공하고 동욱현종이어려운여건에서도 사재를 출연 반공정신 함양을 위해 지은 책과손수제작한가승(家乘)이다. 집안의 장손 정환이 미국에 정착했고 자녀와 손자들에게 뿌리를 알도록 해야 한다며 손수 제작 배포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동욱 현 종이 더욱 더 건강하시어 일제치하의 생생한 기록이 전해지길기대하면서 독 립운동가박희락지사를소개해본다. [독립운동가박희락선생]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그는 3 월 15일 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 남여명(南汝明)등을만나,그들에게김세 영으로부터 전해들은 국내외의정세를설 명하고, 그들의 호응을 얻어 거사 계획을 진행시켰다. 한편 그는 병곡면 송천동(柄 谷面松川洞)권유동(權有東)의집에서권 태원을만나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적극적 으로참여하기로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권태원·정규하 등과 구체적 인거사계획을세웠는데,정규하의제의 로 3월 18일 의 영 해읍 장 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군내 5대 성씨인 권(權)·남(南)· 박(朴)·이(李)·백(白)씨를중심으로,영 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 (蒼水面) 일대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 작하는등사전준비를분담·진행하였다. 그는 3월 18일 오 후 1시 경, 성 내동 (城 內洞) 장 터에 서 태극 기를 높이 들 고 정 규하·남효직·남여명 등 3천여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서 일본 경찰 에게 독 립만 세를 부르 라고 위협하여,그들도독립만세를외치게하였 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 개하고다시시위군중과함께주재소로갔 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 이거만한태도로해산을명령하며태극기 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 위군중과 함께곤봉과돌멩이로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 의일본순사의모자와칼을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 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 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 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부르며만세시위를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 과87발의실탄을빼앗아파기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그는 정규하 등 2백여 명의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연 도의 군중이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 백여명으로 늘어났다.이때 영해주재소로 부터연락을받은병곡주재소에서는인근 평해(平海)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삼엄한경계를하고있었다.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 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 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그곳건물도완전파괴하였다. 그러나평해에서응원출동한3명의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 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 속을 펼쳤는데,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 으며,이해6월5일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소요·공무집행방해·건조물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4년형을받고옥고를치렀다. 해방이후 1967년 1월 16일 영면에 이 르기까지 국민계몽운동에 이바지 하였 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 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 8년대통령표창)을추서하였다. [종친탐방]새해특집븣광복회대구경북지회박동욱前지부장 독립운동가박희락지사아들븣3·1정신은백두부터한라까지하나가되는것 박동욱 前 광복회 대구 경북지부장 3·1운동100주년이지나고2020년새해101돌을맞는다.지난해11월무안박씨대구경 북종친회종수전회장의전화를받았다.우리집안에이번계명대학교창립120주년을 맞아공로상을받는등계명대학교의선각자어른이있는데같이한번찾아가보자고 말했다.그러나時享기간과연말이라신년새해찾아볼것을약속하고지난16일대구 동 구 시 지 동 자 택 을 종 수 회 장 과 찾 았 다 . 처 음 신 문 사 라 하 니 인 터 뷰 를 거 절 하 다 종 중 신문이라니 흔쾌히 맞아주어 기쁜 마음으로 찾았는데 아파트 입구에 기다리고 있던 동욱현종이반갑게맞이한다.처음백수(白壽)를앞두고있다하여거동이불편할거라 생각하고자택으로찾아뵈었는데70대만큼이나건강한모습에한번더놀라지않을 수없었다.살아온연륜만큼이나포근함이배어있는동욱현종을따라자택에들어갔 는데벽에걸린독립유공자훈장증이눈에들어온다. 정부에서는 1981년 박희락 지사의 공훈을 기리 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 창)을추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루 어진 밀수의 형태를 보면 대략 대마도 특공대밀수, 대일냉동화물밀수, 합법 가장 컨테이너 밀수, 보따리상밀수, 여 행자밀수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우 리나라 경제발전과 해상운송수단의 변 화, 소득증대에 따른 관세인하조치 및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 등 정부정책에 변화에 따라 밀수형태도 다양하게 진 행되어오고있다. 이번 호에는 보따리상 밀수와 해외 여행자 밀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보따리상의 사전적의미는 물건을 보자 기에 싸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 면서 판매하는 상인으로 정의하고 있 다. 밀수와 관련한 보따리상은 해외에 서 구입한 물품을 입국하면서 세관검 사과정에 개인휴대품으로 인정받아 면 세로 반입한 후 국내시장에서 상행위 로판매하는사람들이다. 세관에서는 여행객이 해외에서 구입 한 물품이 미화 600불을 초과하지 않으 면 면세로 인정해 주고 있다. 보따리상 은 개인휴대품으로 면세받을 수 있는 미화 600불의 틈새를 파고들어 해외에 서 구입한 물품을 개인휴대품인양 세 관에 신고하여 면세받은 후, 국내 판매 하여이익을취하는것이다. 이러한 보따리상의 개념은 1965.6.2 2.한일국교가 정상화될 무렵 부산항에 서 일본 고쿠라, 오사카 고배항을 운항 한 한일정기여객선 아리랑호가 취항하 면서 탄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당 시는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 였으므로 1945년 해방이후 일본과 국 교단절로 인해 귀국하지 못한 제일동 포들이 부산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소량의 물품을 휴대하여 입국하였다가 국내시장에판매하는형태였다. 그 이후 1983년 해외 관광목적의 여 권이 발급되면서 해외여행이 다소 수 월해지자 보따리 형태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된다. 그 당 시 부산항에서 일본을 왕래하며 보따 리상으로 종사하는 상인이 대략 200명 쯤 정도였다. 이와 같이 보따리상이 증 가하고 이들이 반입하는 물품의 량이 많아지자 이들 물품을 수집하는 중간 상인(일명 나까마)도 생겨나고 보따리 상들은 우두머리를 정하여 하나의 조 직처럼 일본현지에서 물품을 분담하여 구매하거나 판매할 때는 보따리상내에 서정하여진가격으로판매하게된다. 여행자휴대품을 규율하는 관세청 법 령을 보면 여행자가 자신이 사용하거나 선물할목적으로구입한물품에대해미 화600불범위내에서면세하도록규정하 고 있 다. 그 런데 보 따리 상들 이 해외 에서 구입한 물품들은 면세대상이 되지 않는 판매 물품들로 개인 사용물품으로 면세 를 받을 경 우 관 세포 탈죄 가 된 다. 또 한 보따리상들은 물품을 적입한 가방에 이 중장치를 하거나 신변의 은밀한 곳에 숨 겨 세관검사과정에 적발되지 않고 갖고 오기도하는데,이렇게갖고나온물품은 밀수죄로처벌되는밀수품이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인 천항과 중국 칭다오, 연태 등을 왕래하 는 보따리상, 평택항과 중국 위해를 왕 래하는 보따리상 등 개인이 해외를 왕 래하면서 소규모로 장사를 하는 사람 들이증가하게된다. 이러한 보따리상들이 국내반입하는 물품들이 전부 불법적인 것이며 공정 한 경제질서를 해치는 역할을 하는 것 으로볼필요는없다. 일부 품목들은 세관의 통관절차를 거 쳐 반입 하는 물 품도 있으 며 정상 적인 무 역으 로는 국 내에 수 입할 수 없는 품 목들 을 보따 리상 들이 반 입함 에 따 라 싼 가격 으로구입할수있는품목들도있다. 또한 보따리상들은 출국하면서 해외 현지에서 판매할 물품들도 상당량 국 내에서 구입하여 갖고 가 판매를 한다. 다만 보따리상을 하면서 큰 이익금에 눈이 어두워 마약, 금괴, 가짜상품이나 불량 건강보조식품 등을 취급하는 일 부 보따리상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곱지않은시각이존재하고있다. 우리나라는 1980년 이전까지 소득수 준이 낮고 온 국력을 경제발전에 매진할 때였던 만큼 해외여행은 억제되었다.그 당시 해외로 출국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무역관련업무를 하는 사람, 외교관이나 공무원이 해외파견될 경우,유학으로 출 국하 는 사 람 등 제한 된 범 위의 사 람들 만 여권을발급받을수있었다. 1983년 제한된 범위의 관광목적 여 권이 최초 발급되고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조치가 시행되면서부터 일 반국민들의해외관광이보편화되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해외에서 과다구매하거나 국내면세점에서 구입한 고가의 명품가방, 시계 등을 출국시 소지 하였다가다시갖고오는경우가많다. 세관검사를 받지 않고 해외나 면세 점에서 구입한 물품 반입하기 위해 여 행을 동행한 지인에게 대신 소지하게 하여 입국하다 세관에 적발되어 구입 한 물품은 압수조치되고 벌금까지 부 과받는여행자들이있다. 또한 해외여행경비를 절감할 목적으 로 타인의 부탁으로 운반해주는 물품 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상 태에서 운반해 주다가 마약소지죄, 금 괴밀수입죄등으로처벌받기도한다. 2018oyang@daum.net 010-5858-2070 뱚관/세/상/식 관세사/원산지관리사 박상희(오양관세사무소)뱚 밀수(密輸)이야기(4)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