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page

경기도민들의 무력시위는 식민지 무딘-통치히셰 이루어진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억압에서 벗 어나려는 독립의식의 반영이었다. 식민지 무단농정, 중과세, 부역정빌-, 토지수탈, 소작료 인상, 고리대 수탈, 각종 농민적 권리의 부정 등으로 농민들의 삶은 비침해져갔다. 농민들은 이러한 비참한생활에서 벗어니기 위해 “독립만세”를불렀다.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굉주군 중대띤), “묘포 일도 할 것 없고 송 충이도 잡을 필요 없으띠 해인-의 간석공시를 하지 않아도 된다.”(수원군 조싼면 우정띤),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시홍군수암띤) 등 수탈 과 착취에서 벗어나고 토지분배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안성군 양성면, 부천군 계양면 농민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해 불태운 서류들이 민적부, 조선인 거주등록부. 과세 호수대장. 근검절약조합 저금대장, 주세수시수입 명부, 묘지사용료 원부철, 국유지 소작인 명 부등이었던점도이를뒷받침한다. 라. 햇불을들다 경기도 3 · 1운동의 특징은 여러 곳에서 햇불시위가전개되었다는것이다. 햇불시위는조선후 기 농민헝-쟁 때 지주 시용했던 농민들의 투쟁 방법으로 주로 구릉이나 펑야지대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을 선동히는수딘-인 동시에 연대투쟁을 가능하게 히는 것이 햇불시위였다. 고%탄 6개소), 시홍군6개소), 광주군 (7개 면), 부천군6개 면). 수원군 (7개 면), 개성군@개소), 강화 군(17개소)‘ 장딘군(2개소). 파주군(2개소), 김포군(1개소), 양주군(3개 띤), 진위군6개소), 이천군(3개 면). 여주군(마을 단위)에서 햇불시위가 계속 되었다. 햇불시위는 군중동원의 수단인 동시에 시위 군중의 단결력과 연대감을 강화시켰다 . 마. 연대하다 운동이 확산되면서 면 단위끼리 연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수원군 정안면·우정면. 안성군 원곡면-양성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연대투쟁은모두 공세적인 무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위의 책, 515쪽 위의 책. 289짝 4. 휠용올 위한 독립운동의 이해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