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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죄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 자 대표위원으로 선정,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히-였다. 1903년「문헌비고』 편집위원이 되었 고, 1904년「신딘-민사에11센民싸)」를 저술 출간히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6년 동래김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束짜땀JF[짜쏘|||얀않~}'lj폐ψ1]']9외- 동래부사로 재직힐­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 침략을 정치히-디- 일본인들의 횡포로 잠시 관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 뒤 비밀단체인 신민회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셰따'Jt)(쩍)에 들어가 현채 · 박은식 ·장지연 선생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돗이 깊어, 대종교가 중광t훤삐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 문헌을 섭렵, 대종교의 역시를정립하였다. 1916년 9월 니-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총본시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을 통한 독립운동 강화와 동포탬 대 한 독립정신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8년 11월 해외에서 선언된 대한독립선언서에 기징- 먼 저 서명히-며 주동적 역할을히-였다. 같은 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를 조직 총재에 교단의 지도자인 서 일 선생을 임명히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신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총본시를 영인-헌으로 옮겨 선도포교 사업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 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여기에소개하는자료는r조천기」로 대종교에대한이론서이다. 244 IV. 독립운동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