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page

우리 민족의 실력헝;상을 꾀하여 항일운동의 기빈을 조성히며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 하고조직을강화시켜 일단유사시에 봉기할것을결의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 기숙시는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을 각각 수용히-였는데, 조선 인 학생들이 머물던 기숙사를 동료(짜챈‘ 힘했)‘ 일본인 학생들이 머무는 곳은 서료(四싼‘ in- ·겠) 또는 홍료(따갔)라 칭했다. 학교 당국은 기숙사 시설이나 기타 대우에서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였으며, 양 민족 학생들 간의 갈등도 심했다. 이를 극복하그1 자수원고농의 조선인 학 생들은동료에서의 기숙사생활을중심으로 단결해 나갔다. 기숙시에서 그들은 3·1절과개천절에 비밀리에 기념식을거행하였고, 모일 때마다「동료 (싸했)의 노래」를 합창히-며 단합하였다. 1927년 12월 초순에는 동료의 남쪽에 일본식 다다 미방의 기숙시를 신축히고 동료를 강제로 이동시켜 남료(규j했)라 칭하기도 하였으니- 조선인 학생들은 여전히 동료라는 명칭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1928년 9월 동 결사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됨으로써 주동지- 11맹이 퇴학처분을 받 고 기소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동교 힌국인 재학생 44명이 지진퇴학원을 제출힘으로써 사 건이 확대되었다. 그 뒤 주동지-로 김찬도·권영선 선생만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다른사람은 변소되었다. 수 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개척사사건은 당시 국내에서 조직되었던 전문학교급의 비밀결사로 서는최대의규모였다. 1933년 10월 초순 수원고농에서는 김종수 선생을 중심으로 독서회가 조직되어 독립사 상과 사회주의의 전피를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졸업 후 1934년 10월 ‘공산주의자동 맹’이라는 비밀결시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이용필(李갑泌) 선생이 일제에 검거된 것을 계 기로 조직 관계자 11명이 검거되었다. 1937년 3월 22일 열린 공소공땐1서 관련자 김종수, 이용필, 최홍기((ii‘꾀、J£), 김광태(*光泰) 선생 등은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 및 불경죄 등으 로 각 징역 2-3년의 구형을 받았다. 한동민‘ r수원 수원사란들의 꽉립운동」 수원박풍관, 2015. 136쪽 한동안 r수원‘ 수왼사람들의 옥립운동」 수윈박물관 2015. 1 38쪽 한동민 r수원 수원사랍들의 독립운동」 수원박풀관 2015‘ 144쪽 3. 1920년 이후 동산유산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