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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배송료는 12전이었다, 저작지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당곡리 심훈’이라고 되어 있 다. 당시 심훈 선생은 사상문제로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잃고 양친이 시는 충남 당 진에 낙향해 있었다. 비회에는 그림과 함께 ‘沈떤兄짜. 파1丁나IA’이라는 묵서와 인장이 찍혀 있다.‘심훈 형에게, 청정산인이’이라는뭇으로 청정산인은 이여성 선생의 호이다. 심훈 선생은 최용신 선생의 부음 기사를 보고 작가적 직감을 느낀다. 바로 샘골에 와서 취재를 하고 소설 집필에 들어간다. 당시는 검열이라는 상황어 있어서 최용신 선생의 이야 기를 각색, 기독교인 채영신과 사회주의자 박동혁의 사랑 이야기를 큰 줄기로 잡는다. 다 행히 동아일보 공모에 당선되어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총 127회에 걸 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심훈 선생은 기자이자직카이띤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히-기도 했 다. 따라서 그는 1936년 상록수를 영화화하기로 작심했는데, 일제의 빙F해로 좌절되고 말았 다. 그러다가 1936년 9월 16일 37살의 나이로 사및F하고 만다.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피폐해졌고 이것이 심각한 국내문 제로 대두되자 관에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언론기관에서도 대대적인 농촌계몽 운동을 전개했는데 조선일보의 문맹퇴치 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운동들을 취재하고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굉닉= 선생의 「흙」 과 심훈 선생의 r상록수」이다. 126 IV. 독립운동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