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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면민들과 협세하여 오후 4시끼지 시위하였다. 같은 날 서부면(1J패1삐) 감일리(|「 →볕)의 구희서(μ짧,1\:. 농업. '18세)는 이민 40명과 떤시-무소외­ 상일리(上 」I'.)의 헌병주재소까지 만세행진을 벌였다 같은 날 구천면(띠II面) 길리(입'I'.)에서도 만세시위가 시작되어 면내를 순회히는 동안 명일리, 암사리에서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저녁에 헌병주재소가 있는 싱일리에 집결하였다. 1,000여 명으로늘어난시위대는힌벙주재소를포위하고돌을던지며 밀려들지- 일본헌병이 발포하여 1 명의 사망자와2명의 부상지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같은 날 새벽 중부면('I'페|띠)에서도 단대리(끼 판'11) . 탄리(찌먼) ·수진리(시述민)의 주민 300여 멍 이 님한산성 남문 이래에 집결히여 햇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으며 부일협력한중부면장을 끌 어내어 곤봉으로 머리를구타하여 실신시켰다. 돌마면 율리의 힌-백봉어센ii.fl\, 농업. 39세)은 광무황제 인산에 참여하고 돌아외- 3월 28일 새벽 50여명의 이민들과함께 율리 뒷산에 올라봉회를올린 후다른곳에서 합세한수백 맹의 군중 과함께 오후8시경부터 29일 저녁때까지 돌마면의 각동리를돌며 만세시위를전개하였다. 오포면에서는 3월 28일 오전 1시경 고산리와 문형리에서 각각 부근 산 위에서 봉회를 올리 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1,500여 명으로 늘어닌 군중은 광주군청으로 행진하였다. 도 중에 역리댐’'I')와 주막리 주민까지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2,000명 이상으로 증기-하였다. 이들은 군수에게 “한국독립을 승인히는 날인”을 요구하고 군청사 안으로 밀고 들어기- 압박하자 헌병이 발포하여 6명이 즉시-하고 15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시위대도 해산하였다. 경안면 주믹리 부근에 서는 29일에도 3개 처에서 200∼300명의 군중이 여기저기 흩어져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실촌면에서는 4월 6일 오전 7시경 이선리 주민 5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선리로 시위행 진을 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대기-400여 명으로 불어니-지- 면사무소가 있는 오향리로 행진하였 다 오후 5시경 면사무소를 거쳐 곤지암으로 향하였으나 헌병주재소 병력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체포히-자 해산하였다. (I커)장단지역 3·1운동 장딘-군의 3 ·1운동은 3월 23일 진남띤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3월 24일 거곡리 시위 3. 경기도 3 1운동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