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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광탄띤 봉일천 시장에서 3,000명의 주민이 일본 헌병대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 어나 헌병 주재소를습격하고 구금된 인사한 명을 일시 탈환하기도 했다. 이날 천헌면 법원리에서는 봉일천 시위 희생자 김남산의 장례를 치른 후 일제의 민행에 항 의 하는 추모 민-세시위가 열혔다. 시위는 법원리에서 시작되어 문산 방면으로 행진하였는데 도중 에 일제 군경의 발포로 강복갓H찌빠I) 등 2명이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l냐)굉주지역 3·1운동 굉-주군 3 ·1운동은 1919년 3월 26일부터 시작되어 27일과 28일에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4월 6일에막을 내렸다. 중대면에서는 3월 21일부터 송파리 농민 장덕균(짜믿피)과 김준현(金俊띈)이 「독립선언서융+ 「조선독립신문J을 등사하여 배포하고 3월 26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6일 오후 3시 기독교인 천중선( T-따딴)이 시위대를 지휘히는 기운데 약 600명이 독립만 세를 고창하면서 송파 일대를 순회 행진히-였다. 오후 4시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었으며, 이어 송파진 헌병주재소 앞에서 주재소 헌병들과 대치하다 천중선 증 13 명이 구금되자오후6시경 일단해산하였다. 이 시위에 침여하였던 이시종댄lit따. 농업‘ 19세)은 1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읽어 주었으며 “오늘까지는 면사무소에서 일본 일을 하고 있었으나 조 선이 독립히면 부역 ·세금 등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며 독립운동 참여를촉구하였다. 동부변 풍산리에서는 3월 26일 밤 10시경 이민 20여 명이 동리 산 위에 올리카 봉화를 올리고 27일 오전 3시까지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7일 새벽 2시 동부띤 교산리 구징- 이대헌(李人젠, 농업. 37세)이 마을사람 수십 명을 규합 하여 동리 앞산에 올라봉회를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친후내려와새벽 3시 30분경부터 동부면 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그날 오전 11시경 다시 동리민을 모아 오후 2시까지 떤사 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치열히케 부르다 해산히였다. 3월 27일 아침 동부면 밍월리(띨n뽀)의 구장 김교영(쌍敎永‘ 농업 천주교. 62세)은 동리 사람들과 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끼-지 시위 행진하여 풍산리의 주민과 교산리 천현리(꼈싸1]!.)에서 집결 92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