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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히 만세를 부르라고 다시 연설했다. 누군가는 “앞 시람이 죽더라도 뒷사람은 굴하 지 말고 전진히-라”는 연설을 했다. 일동이 쌍봉신에서 3.5km 멀어진 우정면 사무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우정면장 과 면서기들은 도 망치고 없었다. 1천 5백 군중이 면사무소를 돌과 몽퉁이로 쳐부수고, 장부· 서 류 전부를 태웠다. 3시반경 약 2천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회수 주재소로 향했 다, 화수리 주재소 약 lkrn 앞 에서 장안리의 김문명(金JtllJJ)이 말했다. “주재소에 가면 군인이 와 있으면서 발포 하면 죽는 사람이 니올 것이다 . 그 때에는 그 군인을 집 아 죽이자 . 또 주재소를 공격히는 데는 정연한 원형으로 진을 치고 나 갈 필요가 있으니 면장 이 그것을 다중에게 명령하라 .” 백낙열이 몽둥이를휘두르띤서 말했다. “다오늘이 끝장이라 고생ζL 하고활동해야한다. 그리 고남의 일이 아니고각각지-기 일이라고 생각하라 .” 20∼30명이 머리띠를 하고 ’결시- 대’로 서 대열에 앞장을 섰다. 원형으로 진을 치고 나이키-다가 주재소 가끼 어 가서는 3패로 나 누어 일제히 투석하며 습격했다. 일부는 주재소 뒤로 가서 불을 질렀다. 기와 바대JI\端)순 시 는 권총으로 시위대를 향해 빌-포했다 . 3명이 쓰러졌다. 장안띤 사 콕 리 이경백(쭈싸f「I)은 3∼ 4일 후 결국절명하고, 김만우는부상을 입었다. 순 사 는도밍했다. 군중 은 사람을 쏘 아 죽이고 도망치는 순사를 뒤쫓았다. 이봉구가 몽둥이로 순사의 뒷머리를 쳤다. 고꾸라진 순시에게 몽둥이외-돌 세례를 가해 절명했다. 호 }수리 주 재소를 불태우고 순사를 처단한 뒤 일동은 일단 해산했다 . 면사무소와주재소가 타 격목표가 된 것은 , 각종 규제와 온갖 명목의 세금을 징수뼈 괴롭혔기 때문이며, 주재소 일본 순시 들 이 우리 민족을 가혹하 게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와 바타 순사는 관권을 전횡하며 행패가심했 으며, 우리 동포를죽인 데 대한의분의 표출이었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대1 rm俊λ. 제암리 학살의 주역) 중위 가 이끄는 1개 소 대병력이 발언에서 출동하여 회수리를 포위했다 . 회수리 여수동·회수동·굴원 리 주민들은 일경의 보복을 예잉 F 하고 노인들만 남기고 킴캄한 밤중에 원안리와 호곡리 바다쪽 으로 기족들을 데리고 피신했다. 수비대들은 동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집집마다 불을 놓고, 님아있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몽둥이질하여 탈진해 쓰러지면 넷기에 들어다 88 II .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