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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은 3월 27일 구장회의였다. 보쌓는 일을 빌미로 모인 구장회의에서 실제 내용은 만세 시위 결의와 계획이었다. 참석자는 수촌리 백닥열(꺼쨌!O, 어은리 이시우(쑤l낸1퍼), 독정리 최건 환{ti」:IB煥)‘ 징엔-리 김준식(샘웠'11'0. 덕다리 김대식(金셔l’0, 사낭리 우시현(,며M;鉉), 시곡리 김찬규 (*한」;), 금의리 이호덕( 1'.i싼낀、), 석포리 차병환{마i炳많), 노진리 김제윤〈안펌-fl)의 아들등 10명이 었다. 거시-일은 4월 3일이었다. 이날구장들은독정리 구장최건안의 집에서 회합했다. 구장들은동 리 사환을 시켜 주민을동원하여 행동에 들어가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4월 3일 아침 일찍부터 장안면 석포리를시작으로주곡리 등각마을주민들이 사환의 집결명 령을 받고 정훈}면 사무소에 속속 집결하였다. 석포리 뒷산에는 북을 걸어 놓고 북을 퉁퉁퉁 쳐 서 주민들을 모았다. 그들은 조반, 우정 두 면사무소 및 회수리 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또 일본 인 감독순시를죽일 것이니 다몽둥이를 가지고 나오라고 전달했다. 이렇게 전투준비를 위해 몽둥이를 지참하고 거리에 띠라 시간차이기- 있게 출발히여 거의 비 슷한 시간에 장안면 사무소에 집결하였다. 징싼면 사무소에 200명 정도 집결했을 때는 오전 10 시 반에서 11시경이었다. 치병힌--차병혁이 띤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징싼면장 김현묵에게 시위 침여를 촉구하였다. 띤장은 마지 못해 나와서는 시위대를고무히는듯한 연설을 했다.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순사가 발포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항하려띤 만세를 연호하고, 그렇지 않으려띤 처음부티 부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총에 맞이- 죽는 사람이 있 더라도 시체를 가지고 가서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라. 너희들이 거시를 하려고 한다면 심익h해서 는 안된다. 충분한 결심을 하고 하라.”고 연설하였다. 면장은 짐짓 만세까지 선창했다. 시위대 는 크 게 고무되었다. 시위대는 목조초기집인 조반면 사무소를 돌 또는 몽둥이로 파괴하고 연장 과 면서기들을 앞세워 우정면과의 사이에 있는 해발 116rn인 쌍봉산으로 갔다. 이용우이상기의 다섯 명을 군중 앞에 세워 12시경에 쌍밝 f으로 갔다. 쌍합앤l 수촌리, 석 포리, 주곡리, 어은리 사람 6·7백명이 모여들었다. 여기서 만세를 크게 부르고 12시반쯤 우정 면으로 출발했다. 군중은 1천 5백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군중 기운에 “지금부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총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든가 “바닷가의 간척공시-도 안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죠안l-띤장은 3. 경기도 3· 1운동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