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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동리 성영 논 밭 기타 비고 화산리 기봉규 3.000 7.000 김영보 1.000 1.( ]00 가목1채 한각리 최진협 1 ‘ 500 1.000 최진승 1.000 6 ‘ 500 우정먼 한흥교 2.000 2.000 이화리 한병교 1.000 1.000 한세교 1,000 500 빅시정 3.000 소1두 주곡리 이윤성 1, 5()( ] 500 매항리 백낙온 1.500 2.000 필탄연 고주리 김홍혈 3.000 3.000 겨| 24영 38.450 37.950 76.400 ※ 자료 金홀짧 , 1983.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미래문화사, p, 30 1918년 천도교 중앙교당 신축지금을 모금하였을 때 이곳 교인들은 전답과 기옥등 74.600명 을 헌납하였다.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으로 종교조직과 향촌 조직에 동시에 영향 력을미칠수있었다 . 3·1운동이 발발하자 삼괴지역 천도교 지도자이자 조반면 수촌리 구장인 백닥렬(「l씻烈), 김성 렬(1 괜烈. 펼틴면 고주리), 안종후('!,( 쩨'/. 향남면 제암리) 등이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걷 ~1-< 겨하고 돌아와 비밀리에 독립운동준비에 칙수했다. 백낙렬은 남양교구 각 전 교실을돌며 거시를 협의 했고, 고주리 전교실에서 안종환·안종린을수원에 올려 보내 중앙의 지시를받아오게 했다. 두 사람은 수원에서 일본 소방대와 일인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도망쳐 돌아와 이병헌 으로부터 지방교구 자체의 부담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중앙의 지시를 전했다. 이에 김흥 열은향남·팔탄띤을, 백낙열은조싼·우정면을책임지고추진하기로하였다. 3월말 또는 4월 1일 을 전후하여 조싼·우정면 지역에서 산상햇불 시위가 피급되고 있었다. 4 월 1일 밤 수촌리 개죽산의 봉회를 신호로 조암리 쌍붉}, 팔틴-면 천덕산, 향남면 가재리 당재 봉, 7-cJ 싼면 석포리 무봉잔, 어은리 남산, 우정면 이화리 보금산, 장자터 봉회산. 운평리 성신재, 매향리 망원대 등각산봉우리에서 일제히 봉화가치솟았다. 장안·우정면 만세시위는 여느 다른 지역처럼 장날을 기해 장터에 모여 전개한 것이 아니었 다. 이곳 시위운동은장날과관계없이 조직적인 주민 동원을통해 시위운동이 이루어졌다. 86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