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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호면 성호면 최초의 시위는 3월 14일 오산리에서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끝났다. 이후 열흘 가 량 침묵하다 잇달아 사뻔l서 시위가 터져 나오7] 시작했다. 지방민들이 지체적으로 시위운동 을 조직화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평화적인 민세시위가 공세적인 시위로 니-0~가 일제 관공리의 구축으로까지 나 아가게되었다, 3월 25일 오산에서 보통학교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기옥을 파괴 하였다. 이때 일병의 발포로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이튿날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3월 29일 수원 읍내, 태장면, 안용면 등지에서 시위가 계속되었고. 오산에서는 800명의 큰 시 위가 있었다. 기독교 천도교 보통학교 학생들이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인가욕을 습격히여 피괴했다. 이날 핀공서 또는 민가 13채가 파괴되었다. 시위는 오후 4시경 우시징에서 200-300명 기량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띤서 시작되었다. 성호면 세교리 안닥쉰갖옛~i닫. 또는 쟁,/II띠. 당시 μ세. 농업)이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고 군중들은 저마다 “관공서를 파괴히-라”고 부르 짖으며 정거장을 거쳐 면시-무소와 경찰관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군중은 오오키 기이치(太木센 서j) 순사의 제지를 뿌리쳤고, 유홍진과 기수 안닉순을 비롯한 6-7 명을주재소로끌고가자“붙집L아간지를석빛P하라!”며 격렬한항의 시위를벌였다. “,q람을 인수할 대표자를 내라”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일본순사가 마지못해 풀어주었다. 구금되었던 동지를 구해 낸 시위 군 중은 더욱 열광적으로 만세를부르며 면사무소로 니깅f갔다. ’‘면장은 어디 있는가? 그를 내어 놀아라!” “면장은 왜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군중들은 일제히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져 창유리외- 창문을 모두 부수고 다시 주재소로 몰 82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