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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동리민 80여 명이 모였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최호천과윤의병의 두 사람 이 “내가리대리의 이민도 규합하자”고 제의하여 가리대리 각 집을 돌며 불러내어 총 100여명의 인원이 되었다. 최호천과윤의병은군중을 인솔하고 밤 10시경 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하띠 “만일 주재소 직원이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결코 퇴각하지 말라. 돌이나 곤봉으로 대항하라”고 하면서 지휘하였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 주민들은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주재소 안의 순시들이 소등을 하고 숨어 있자 최호천은사람들을 이끌고 주재소 순사보 최우창과 김정환, 금 택성웅{金캠111.찌0의 집으로 딜려갔으며 다른 일단은 주재소 뒷 벽 일부를 찔러서 무너뜨리고 게 시판을부수었다. 순사보들은 모두 집에 없었다. 다시 주재소로 되돌아오니 일본인 순사기- 나왔다. 최호천 윤 의병 두 사람은 순시에게 이정석 석방을 요구했다. 기세에 눌린 순사는 놓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종운은 “계약서를 제출하라”고 강박하였다. 순시는 “틀림 없이 방면하도록 하겠다”고 말하므로 만세를 외치면서 해산하였다. 3월 29일에는 북면 구로리에서 100여 명의 시위가 있었으며 30일에는 영등포에서 다시 2,000여 명의 민채시위가 있었다. 이날 과천면 막계리외- 주암리 주민들이 각기 자신의 미을에 서 민세시위를 벌였으며 3월 30일 하리의 이복래(줘싱米)기-동리민들에게 통문을 돌려 저녁 8시 남태령에서 햇불시위를 벌이고 읍내로 행진하여 경찰관 주재소 우편소, 보통학교 등을 돌며 햇불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30일 오전 10시 수암띤 18개 동리에는수암리 비석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모이라는 격문을보고, 익: 2천 명의 주민이 수암경찰관주재소의 서쪽밭에 모여서 “수암주재소·면사무소 를불태워버리자!”고 외치면서 몰려까’만세를불렀다. 순사가 와서 해산을 명령힘 에도 유익수가 선두에 서서 읍 내쪽으로 군중을 인솔하여 읍내를 돌며 만세시위를왕성하게 전개하였다, 홍순칠은 국유지 소작인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된다.”고 하며 소작인을격려했다. 수암면 월파리의 유익수는 3월 30일 수암띤 시위에 참여하고 이튿날 수원군 빈윌면(’1·:n 1111) 시정에서도 5, 6백 명을 지휘하여민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해산하면서 7원 60전어치 술을 사서 76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