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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를 불렀다 지도면 행주내려(후州씨뽀)와 외리에서 500명 시위대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 데, 일본 헌병이 출동히여 시위주동자 38명을 체포하였다. 28일 햇불시위까지 하루도 빠집없이 고양군 내 1v H 면에서 치열한독립민세운동이 전개되었다 . 고OJ' 군민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일반적인 시위로부티 주변 산 위에 올라가 햇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거나 시장 점포를 철시함으로써 식민통치에 대항하였다. 시위규모는 적게는 30명으로부터 2,000명에 달하였는데 대부분 100명에서 800명인 수백 명 단위였다. 청량리역에 서는 지나가는 전차에 돌을 던졌다. 면소재지에서는 면사무소 부근에서 시위를 전개히는 경우 가 대부분이고 묵섬 ·중면 일신-시위처럼 노골적으로 친일적 태도를 보였던 면장들이나 일부 면 서기들이 주공격대,,_J 이었다. (9) 시홍시역 :) . 1 운동 시흥군의 독립만세시위는 3월 7일 영등포에서 보통학생들의 시위로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으 나, 이후 4월 23일까지 2주일 이상 잠복기가 계속되었다. 그 후 3월 23일 수백 명 단위의 시위 운동이 군내 여러 곳 에서 동 시다발로일어나4월 1일까지 치열한양상을보였다. 최초의 시위는 3월 7일 북면 영등포리 시흥공립보통학교 학 생들의 동맹휴학과 민세시위가 일 어났다. 3월 히순이 되지- 영등포 일대의 상인들이 가 게문을 닫고 일제히 철시하여 3· 1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에 군수, 경찰서장 등이 상점가를 돌면서 상점 문을 열도록 설득과 위협을 하며 다니기도히-였다 . 3월 23일 영등포면 양평리 탄원기(까i元캄. 직공 . 기독교인)의 주도로 400여 명의 주민들이 독립 민세를 벌였다. 이날 당산리, 노량진리, 양평리 등지에서도 모두 1,200여 명의 주민들이 각지에 서 독립만세를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3월 25일 신동면 잠실리 주민 100여 명이, 26일에는 OJ=재리 주민 20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 개했다. 이날 원천새t싸·) 지역에서 300명의 주민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27일 밤 서면 노온사리(걷냄、'i''I'.)의 이정석(주끼μ)이 주재소 근처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 다가 구금되자 이튿날 그의 아버지 이종원(쭈宗냉)이 동리 사람탬게 이들의 구출을 호소했다. 3 ‘ 경기도 3 · 1운동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