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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지역 3 · 1운동은 3월 18일 읍내 장터의 1만 명 시위 이후 4월 중순까지 거의 한달간에 걸 쳐 강화 군내 전역에서 띤· 리 단위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감리교와 성공회 등의 교회 신자들이 강회군전역에서 만 세시위운동을주도한점도특정이었다. (ω 연천지역 3· l운동 연천군은 경기도 동북부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3월 21일 백학면에서 첫 시위가 일어났 고, 3월 29일부터 4월 2일 시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징-날 미산면 석장리 사는 조우식(돼씬떼괴- 왕징면 동중리의 정현수 (옛!”‘f장)는 군중들 에 앞장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만 세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장터 인근 민가에 숨어 있던 면장 윤규영(Jr 圭榮)을 끌어내어 시위대열의 선두에 세우고, 집집마다 대 문을두드리거나 소방용 경종을울려 주변 일대의 주민들을 더욱 집결시켰다. 군중의 수기-불어 나자 시위군중을 백학면 면사무소로 쇄도히여 유리창과 문을 파괴하였다. 이후 밤 10시경 200 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부 르며 마전 읍내로 들어가 태극기를 만 들 어 문묘 앞에 세우고 독립만 세를부른후 미산띤 석장리로 기는 도중 해산 되었다 . 적성면에서는 장파리에 시 는 한은동 (~·파없東)이 3월 29일 이 미 을 구장 유병성(쩨 l자l'I:)의 집에서 시국에관한토론을하고 3월 31일 밤 20여 명이 동리 뒷동산에모여 햇불을올리며 대한독립만 세를불렀다. 중변에서는 3월 31일 적거리 나용기(짧한基)와 이홍식(주바떼)이 의논하고 격문 6통을 작성하 여 삼꽂리, 황산리. 합수리 등 면내 각 구조벼l게 보냈다. 4월 1일 오전 7시 중면 삼꽂리에 약 400여 명이 모여 읍내로향했다 . 읍내 근처에 이르렀을 때 헌병대가출동히여 해산되었다. 관인면 삼율리에서는 기독교인 조아당과 박 용길 등 이 격문을 돌려 다랑고개에 수백명을 집결 시켜 독립만세를 부르며 삼율리, 신촌동‘ 남창동으로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불 렀다 . 「)김포시역 5· l운동 3월 22일 김포군 월꽂띤 고잉=리 시는 성태영(lilt泰水) 과 군히-리 백일흰 {「l 「|뺏), 이살눔, 고정리 72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