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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천도교인등수백 명이 항의하며 만세시위를전개히였다. 이에 일제군경은시위대의 해산을 조건으로 구덕희를 석빙P하였다. 힌편 보성고보 학생 오영섭(11샤永燮)도 강화경찰서 순사부징에게 시위틴-압을 경고하는 글을 보냈으며 협-일학교(合一딴£) 교사 구연준(μ然팎)을 비롯해 김한영 (金物水) · 김영희(企;j(.패) ·조봉임t띤4깜) 등은 3월 20일경 r 자유민보 (自山야패)」 등 십수 종의 문건 을 민들어 강화주민에게 살포하였다. 강회읍내 시위는 교동도 방면으로 파급되어 21일부터 수일간에 걸쳐 만세시위가 계속되었 다. 21일에는 화개면의 주민 130여 명이 교동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 에도 주민 100여 명이 3시간에 걸쳐 일경과 대치하며 시위하였다. 23일에는 교동도의 전역으로 확산되어 학생과 기독교인 등 100여명이 교동으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24일에도 주민 100여명이 교통 읍내 공자묘(1L子倒)와 면사무소 및 옛 군아{lIB짧j) 터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26일에는 화개면 주민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7일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강화읍에서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부내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 서기를 폭행했다. 일제 헌병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29일에는 부내변 월꽂리(R 빔 IJ:!.)에서 주민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고창하였다. 4월로 접어들자 만세시위는 강회군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일에는 양도면의 길정리(古 ”;1里), 송해면 양오리(I싸fli.및)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송해면 소재지인 솔정리에서는 성공 회의 중심인물인 고성근이 신자들과 촌민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벌였다. 양사면 산이포(山센 때. 현 칠산리)에서도 수백명이 。단핸l 등불과 태극기를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4월 2일에는송해띤 주민 200여 맹이 봉류산{J.r\l流iii)에 올라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양사면 철 산리(체iii 민)에서도기독교인과주민등 150여 명이 전날에 이어 시위를계속히-였다. 이후 잠잠하던 시위는 4월 7일 삼산면에서 이안득('f安쉐)의 주도하에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 수 명이 당산산정에 올라봉회를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8일에는 선원면, 양도면, 삼산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서는 산위에서 햇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히-였다. 4월 9일 이후에도 13일까지 삼산면·양도면·불은띤등지에서 미을주민수십명이 주로야간 을틈타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3. 경기도 3 · 1운동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