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page

15일) 아침 9시 가평에 집합히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 는 격문 3통을 북면의 각 몽리 이민들 에 돌렸다. 또한 각 마을에서 19명을주도자로 선정하였다. 3월 15일 군북면 면사무소 앞에 수백 명의 군중들이 모여 조선독립민세를 외치며 가평군청과 읍내 각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십수명이 가평헌병분견소에 붙들려가자 다음날인 3월 16일 약 200명의 이민들이 북면 목동리를 떠나 가평헌병분견소로 호하던 중, 목동리 당고개[·빨빼] 에서 군수와 치안 경찰, 헌병 오장 마츠모토(松本銀빼가 이끄는 진압대를 만났다. 군중은 총칼 로 위협하는 군경에 대히여 투석으로 대항하고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주도자들이 체포되 면서 시위대는 기세를 꺾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15∼16일 이틀 동안 시위로 붙잡힌 사람이 70 여명이었다. (5)강화지역 j· 낸동 1919년 3월 8일경 독립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감리교계 지도자 유봉진(정lj}.(JI폐) 등이 읍내 장날 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ftl- r국민회보』 등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18일의 거사를 알리는 「강화인민에게」라는 전단과 「독립가J를 만들어 배포했다. 거사일인 3월 18일 오 후 2시 강회장터에서 유희철짧I)뺀뀌) ·황일남·황윤실 등의 결사대원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돌다리 양쪽 장터 군중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신문리 시장을 한바퀴 돌고 관청리로 행진했다. 급히 출동한 일제 군경이 주도자들을 체포했으나 시위 열기를 꺾을수는 없었다. 유봉진은종루 의 큰종을쳐서 군중을모았다. 웃장터 -아랫장터는시위군중으로 기득하였고 시위대는시징L에 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군중은 1만 명에 육1'!f하였다. 군수 이봉종(李”M페도 시위 대의 요구에 만세를 불렀다.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벌인 군중은 오후 5시경 경 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인시들의 석방을 외쳤다. 경찰이 굴복하여 유희철 ·장상용·조기신을 석빙F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써l 모여 늦 은 밤까지 만세를 고창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18일 읍내에서의 대규모 시위소식을 접한 일제 는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다. 현지에 도착한 일제 군경은 19일 오전 9시부터 각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다. 이 들은 길상띤 온수리의 천도교구를 수색하고 구덕희(具씬페를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날 오후 6 70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