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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오후 4시경 광적면(If,•폐面)에서는 가납리(댐|셔里) 백남식(「l마:j•떼 등이 주도하는 350 여 주민이 광적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일본헌병이 제지하자 일단 해산하 였다가 다시 400여 명이 가납리의 추교시징f쩨댐l듀짜)에 재집결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 위대는 일본헌병을 대동하고 온 면장 이히용4李河鎔)과 일본 헌병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일본 헌 병의 발포로 백남식 ·김진성 -이용화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정흥띤(Uζ빡”1i) 교현리(템1iifil.및)에서도 3월 28일 오후 8시경 이회명(주付비J) 등이 동리민 수십 명 과 함께 동리 주점에 모여 만세시위를 했으며, 29일 이른 아침 300명이 다시 모여 띤사무소로 돌입하였다. 일본헌병이 총기로 위협하자 총기를 빼앗는 등 적극 대항하였다. 일본헌병의 발포 로 1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지를 내었다. 별내띤 고산리의 19세 청년 유해정때II파正)은 붓을 들어 “만국이 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음 에도 불구하고 이를 돌려 주기를 꺼린디띤 분개한 백성이 일제히 궐기하여 불의의 니리에 보복 할 것이디. 나도 한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 번 죽음으로써 원힌을 씻을 닐-이 있을 것이다.’는 내용을 써서 천옹써l게 전달되도록 동경부 지사 앞으로 보냈다. 이 편지가 3월 27일 동경 부청에 도착하여, 궁내성 궁내대신 관빙 총무과 앞으로 전달되어 ‘천왕에 대힌-불경행위’로 징역 3년에 처히여졌다. 노해띤0차짜1ili) 창동리(:(끼,,”뽀) 부근에서도 5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주동자 외 92명이 체포되 었다. 진건띤(힌l따1M) 오남리(세|힘IT!) 수십 명 만세시위 시둔면(양•i:!.1Ili) 자일리(「|逃If!.) 30여 명의 시위가 있었고, 부근의 동리에서는 봉회를 올리며 가세하였다. 3월 30일 주내면(1'1'11시|띠)에서도 6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공격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31일 진접띤부평리 이재일-김순만등의 주도로 600여 명이 광릉천에 집결히여 독립만 세를 외쳤다. 8명이 체포되었다. 4월 2일에는 봉선사 승려였던 김성숙(令星써) · 이순철 · 현일성 강완수등 4명이 주동이 되어 양주군광주시조L에서 격렬한민-세 시위를 벌였다. ({)가평시역 :) . l운동 가평군 북면 목동리(써uj 인)의 이윤석은 3월 14일 정흥파일명 흥二룡l를 민-나“세계각국공회(公 센)에서 속국은 이번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니 조선도 역시 독립할 것이므로 음력 2월 14일G월 3. 경기도 3 ‘ 1운동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