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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천도교인들은 3월 27일부터 문학동 시위, 3월 28일 님-동시위, 3월 30일 평회동 시위, 4월 1일 월미동 시위 등 계속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30일 시위는 문학동의 천도교인들 과주민들이 평회동에서 북성고지까지 나아갔다. 외리에서도 4월 1일 2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내리(內민)의 김심수 (令二펴) 등은 상인들의 철시를 촉구하는 경고문 18통을 만들어 우각리 17개 점포에 살포했다. 그래도 점포를 열고 있자 4월 2일 또 다시 “철시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을 경고하 는문서를만들어 배포했다.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박용희 ·장붕· 김규· 이종욱· 이규갑·홍면희 ·안상덕 등이 조선국민대회 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선포하려 하다 일제관헌의 취체로 선포식을 열지는 못하였다. 이후 4 월 23일 서울에서 전국 13도 대표 24인의 명의로 국민회의를 개최하고 「국민대회취지서」·「임시 정부선포문」을공포하며 임시정부선포식을가졌다. rnoJ주지익 5·1운동 양주군에서는 3월 13일 미금면 펑내리(J平씨믿) 구장 이승익(李꺼 젠, 농엽. 당시 %세)은 시위확산 으 막기 위해 총독 히-세가왜ht까川ljj’패)기- 배포한 고유문(告I삶.Jt)을 낭독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 을 소집히-였다. 100여 명의 주민들은 고유문 내용을 야유하며 민쇄시위를 렐였다. 다음날 14일 에 이민('11,떠 150여 명이 다시 집결하여 평내리에서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기- 있는 금곡리(싼 유띄) 방향으로 행진하다 일본헌병의 제지를 받아 해산하였다. 3월 15일 외부면(Jl.씨(Ii) 송촌리(松村필)의 기독교인 이정성(李」LE1R‘ 41샤]) 등과 김정해金IF.강)기­ 송촌리와 부근 주민 500여 명을 이끌고 면사무소가 있는 덕소리(1,한젠H)로 행진하였다. 시위대 는 총칼로 저지히는 일본헌병들을 곤봉으로 맞서면서 헌병주재소까지 쇄도하여 압빅해 갔다. 헌병들은 공포를 발사하고 40명을 총칼로 체포함으로써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7명을 기소하 였다. 화도면(fl\파1f1i)에서는 3월 16일 이달용{李J소찌의 주도하에 답내리와 월산리 주민 200여 명이 3월 18일 밤 10시에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일본 헌병이 주도자 3명을 구금하지- 1천 명으로 불 어난 시위군중은 마석우리 헌병대 병침- 앞에서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가열되 3. 경기도 3 · 1운동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