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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재소를쇄도해 관헌을입빅히 는 데 이르는 다OJ 한형태로독립만 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2) 인천시역 3· l 운동 최초의 개항장이며, 수도 서울의 관문이자 침략의 전초기지였던 인천에는 1919년 당시 인구 20,211명 중 44.4%인 8,973명이 일본인이었 을 정도로 일본인의 거점도시였다. 이러한 지역 특 성상3·1운동은활발하고강력하게 일어날수가없었다 . 3월 6일부터 부내 내리공립보통학교(현 장영초등학교 전신) 학생들과 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 교 저신)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이날동맹휴혁에 들 어가 3월 14 일까지 계속했다. 경칠이 학부형들을 소집하여 주모자 25명을 처벌하겠다 는 발표를 히-자 주동 한4학년 대부분이 결석하 여 항일의지를표 명했다. 3월 7일부터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3월 9일 아침에는 50여명이 경인가도 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니 순식간에 3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 오후 5시에는 기독교 신자. 교회 청년, 학생 등 30여 명이 만국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해산당했다. 3월 10일 시내 중심가에서 시민과 학 생 200여 명이 시위행진 을히-였다. 8명이 구속되었다. 3월 13일 넘-쪽의 소래떤괴- 북쪽의 계양면에서 주민 수 백명이 각기 소래산과 계양신에 올라 봉화 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는 부평지역 시위에 대비하여 순 시대를 증원하여 경계에 임 했다. 3월 24일 정오 일단의 청년들이 부평징 L에 모인 장문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밀고 나아갔다. 일제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하여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이날 계양면 장기리 장터에서 600여 명이 독립만세를불렀으며 계남면 소사부근 6개 미 을 에서 독립만세를 고칭-했 다. 3월 27일에 「조선독립신문과 + 격문들이 조선인 가게들 에 배포되었다. ‘만세를 부를 것과 철시 하라’는 것이었다. 3월 28일에는 부천의 수십 군데에서 50-60명 단위의 군중들이 봉화를 올리 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30일부터는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철시(麻市)하여 항쟁에 동참하 기 시작했다. 일본경찰이 싱점 문을 열도록 협박했다. 그러면 문을 열었다가 돌아서서 곧 닫아 버리는항쟁을 계속했다. 경칠의 압력에도 일반상인은 쉽사리 문을 열지 않았다. 66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