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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구장직을 맡고 있었다. 백낙열은 인근 고주리의 김성렬(안i떤!!. 1871∼1919)와 제암리 안 종후(갓찌’l‘ 1889∼1919) 등과 함께 지역 대표로 1919년 3월 서울 전역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에참가했었다. 이후수촌리에돌이온백낙열은인근주민들에게도 3·1운동의 기운을전히­ 고자 히였고, 천도교인들은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 이후 4월 4일과 5일에 징안띤과 우 정띤에서 전개된 시위에서 백낙열은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꿀어 조언 ]-면사무소, 쌍봉산. 우 정면사무소와회수리경찰관주재소등을습격했다. - 이후 일본군의 보복이 시작되자 백낙열은 피신하여 계룡산에서 3년을. 수촌리로 돌아왔다 가 다시 고주리의 한 암자에서 10여년을 은거하다 1937년 1월 4일 순국했다 . 백낙열과 함 께 서울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던 김성렬과 안종후는 제암리 학실 ν사건 당시 일본군에 의 해 실해당했다. 대힌민국 정부는 2002년 백닥열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김성렬과 안 종후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추서하였다. 4) 현황분석 -현황 - 징인-면, 우정면 민- 세시위를 주도했던 백닥열 선생의 생기- 터는 징인면 수촌리 729번지(망 축발견 60번지)이다. · 우정읍사무소가 있는 조암리 동북쪽 3.0km이며 징반면사무소 터에서는동북쪽 1.7km 떨 어진 위치에 있다 . 인근 수촌리 674번지(수촌말)에는 일제가 자행한 탄맙이 있었던 수촌교 회가위치해있다. ‘ 백낙열 선생의 집터는 82번지방도에서 방축말길을 따라 들어가띤 빙-축말 중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후손이 새롭게 신축힌 - 집이 자리잡고 있다 . 방축말 바로 인접하여서는 ‘회성장안 첨단제2일반산업단지’가 한창 조성 중에 있으며, 그 사이에 조싼2호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문제점 주댄에 안내판이나 유적지임을 일리는 방향지시표 등이 전무히-여 일반인 들이 찾이까기에 2. 경기 서부 건조물 및 터지 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