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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정병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일제에 매수된 부하 박노천(시、씬£)과 신죄균(1j 1左껴) 등 이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며 유인하여 3월 31일 용산역에 나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집-혀 1909년 6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 정용대부대 원수부 죄군장 정용대(뺑容大. 쨌用大)는 경기도 적성 출신으로 특무정교를 지낸 해산군인이 었다. 그는 윤인순의 휘히에서 있다 창의원수부의 좌군장을 밑았는데 주로 경기도 서부지역인 고양교하·강화김포 풍덕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0∼40명의 부하를 거느렸던 그는 1909년 9 월 적성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1910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강기동{찾과東)은 정용대의 부장이었다. 그는 경기도 장단(tt폐) 고랑포(古劉rll)에서 헌병보조 원으로 있었을 때 투옥된 의병들을 탈출시켜 주고 그도 길인식 등과 총과 탄환을 탈취하여 부 대를 이탈히여 창의원수부에 들어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체포된 이은친의 뒤를 이어 창의원수부 중군장으로 연기우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경기지역 항일투쟁을 주 도했다. 일제가 탄압의 강도를 더해오자 강기동은 부히들을 해산한 후 북간도로 밍-명하기 위해 원산으로 갔다기- 1911년 2월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상과 같이 창의원수부는 1907년 후반 강원도 원주에서 조직된 이후 1908년 후빈에 경기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은찬을 이어 강기동이 창의원수부를 계승히여 1910년 전후까지 활동했으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활동무대 를옮기려다좌절되고밀댔다. 아. 의병 퇴조기의 경기도 의병 1909년 말이 되면서 의병들은 일제의 토별로 인해 투항하거나 재기를 기약하고 부대를 해체 하고 잠복했다가 체포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경기지방은 황해도와 강원도와 경북산간지방과함께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치열하게 마지막 의병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경기지빙벼l서 투쟁의 불꽃을 피워 올린 의병부대로 연기우 부대, 김기동 부대, 전 성서부대,홍원유부대등이대표적이었으며 그 밖에많은군소의병부대들이있었다. 50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