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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펀 양반 유쟁들도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에는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이, 7 월에는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 민족식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했으며, 홍주성 이 일제에 의해 힘락되자 민종식은 1907년 1월 경기도 관내로 이동하여 여주, 안성, 광주, 용인, 양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한국에 통감부‘ 를 설치한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 헌병대가 정악하고 전국에 경찰 배치를 늘렸으며, 친일내각을 통해 각 도에 “창의 통문은 모두 거두어 올리고 의병이 모이는 것 을 엄히 금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또한 경부 26명 순사 520명, 조선인 순검 1,000명을 증원 배치하고, 각도마다 경무분서 26개소를 설치하고, 분파소 120개소 를증설하였다 . 다. 군대 해산과 해산군인 봉기 1907년 7월 일제는 네댈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특시를 비밀리에 파견한 것을 구실로 광무황제(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7월 17일 서울 등 여러 곳에 반일 격문이 나붙었다. 다음날 오후 11시 종로에서는 상인, 학생 등 시민 수백 명이 결사회를 조직하여 광무황제의 양위를 반대하며 대한문 앞에서 일본 헌병, 순사와충돌하였다. 7월 19일 양위조칙을 내리자 오후 4시 한국 군인, 시민들 이 들고 일어났으며 시내에서 총격전 이 벌어져 일본인 3명이 피살되었다. 사인들은철시로항의를표시했 다. 7월 20일 오후 4시 서울 주둔 시위대 제1연대 제3중대 병사 수십 명이 탈영하여 경무기관을 습격하고, 일본군과총격전을 벌였다. 서울 시민 결사회 600멍이 서소문 밖 석교 경무지서를 습 격했다. 또 이들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내신 임선준의 집에 불을 질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조치가 발표되었다. 서울 시위대를 시작으로 지방 진위 대에 대해서도 8 월 3일부터 차례로 해산시켰다. 마지막으로 북청 진위대가 9월 3일 해신 -되 었다. 8월 1일 군대해산이 있던 날 서울의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서|、셈엇) 은 해산을 거부 하며 “군인으로 서 능히 나라 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변 죽 어도 아끼울 것 없다”(댄 不流낀I파 l b!不祝싸忠 萬死뺨、· |뷰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 결하였다. 이에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1 38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