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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서는 8월 20일 일본 헌병 2명이 군수와 서기를 대동하고 군민을 강제로 동원히려 하자 군민 4∼5천명이 관아로 몰려들어 군수를 꿀어내고 돌과 몽둥이로 창문을 부수며 “백성을 죽을 곳으로 꿀고 가려 힌다.”고 항의하였다. 9월 14일에는 시홍군에서 일본군의 강제징발에 항의하여 수천의 시흥군민이 봉기하여 군수 와 일본인 철도 역부를불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의병 봉기가 가시화되는 것은 1905년 4월말에서 5월초 죽산군에서였다. 죽산에서 이인응{李 파l센 서세, 농업)이, 죽산과 안산 등지에서 박석여(朴쐐*)가 280여 병력으로, 양근과 여주 등지에 서 이범수{쇠E’‘페)가 의병을 일으켰다. 광주의병장 구만서(묘꾀,1::. |씨光)는 포군 50여 명을 이꿀고 6월 7일 새벽 지평군 일진회지회장 이깅수등7명을 포살했다. 5월 13일에는 님양군 대꽂도(大뽑시)에 수적선(水!懶샤) 2척이 나타나 뱃길을 봉쇄하고 섬안의 부민에게 100만낭을 약탈하고 17일 물러났다. 8월 30일에는 포천군 서면 문래현(f”l來싸)에 적성 김악산의 활빈당 10여 명이 출몰했디-- 이 시기에 이처럼 경기도 각지에는 의병 또는 비도나 활 빈당을칭한무리가크게 일어났다. 나. 을사조약 이후의 의병전쟁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충북, 경북, 강원도가 접하는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다. 특히 양주, 적성, 음축, 축산, 용인, 수원, 지평, OJ근, 강화 등 경기 일원에서는 일제의 금고 지소나 우편국을습격하고, 전선을끊거나전주를파손히는등의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06년 4월 12일과 14일에는 이기두(f뀔삼‘ i.-~rt.) 부대 10여명이 음죽군 서면 송이천(松 ] ||), 동면 니래동을 공격하였으며‘ 17일에는 이 모(!f:)가 이끄는 38명의 의병부대가 여주에서 천포 (싸며)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6월에는 여주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나 여주 군수가 서울 로 도밍히는 일도 있었다. 1907년 1월에는 의병 수십 명이 교히군의 전 판서 민영달 집을 습격 히여 꾼량을 정빌해 갔다. 이러한 모습들은 활빈당과같은농민 무장집단이 의맹으로 전환해 가 는양싱을 보여주었다. 2. 경기도 국권회복운동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