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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학농민운동과청일전쟁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은 군민들에게 물세를 거두기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보를 쌓은 등 갖 은 방법으로 주민들로부터 재물을 거두어들이면서 시정을 진정히는 군민들을 탄압했다. 1894 년 1월 10일 밤 참다못한 군민들이 전봉준을 앞세워 고부관이를 습격했다. 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파견되어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동학농민군 1만 명이 부안을 점령하고, 정읍 황토현에서 도절제사영(都鋼IJ使營)의 군대[윗,떤]를 격파했다. 동흐받은 이어 전라도거의 전역을손에 넣은후 4월 27일 전주성을점령하였다. 당황한조정은다시 청나리에 원병을요청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이어 세 번째였다. 6월 6일, 청국은 약 2,460여 명의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파병했다. 6월 8일 일본은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설)을 설치하고, 제5사단 혼성여단 선발대 4,500명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조선과 청 나라기-항의하였으나, 일본은 6월 하순까지 병력을 8,000여 명으로 증원했다 청국과 일본의 충돌 기능성이 높아지자 당황한 조선정부는 전봉준의 폐정개혁(까政改l’|’i) 27조 항을 받이들였다. 동학농민군이 철군, 해산하여 12일 만에 전주가 정부의 손에 돌이왔다. 1894년 7월 25일, 일본 순OJ=힘-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아산 만의 풍도 부근에서 청국 순OJ= 함 제원(懶)호와 군함 광윌 ζζ)호를 공격히였다. 시흘 뒤 일본 육군은 충남 성환에서 정국군대와 전투를 개시했다. 청국군은 500여명의 시상지를 내고 평양으 로 퇴각했다. 일본은8월 1일 선전포고하고, 개전 1달 반 만에 서해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11월 21일 랴오둥반도뤼순항을점령했다. 나라의 위기를 본 동학농민군이 나라를 돕고 백성을 안정시킨다는 ‘보국안민(때댔l핫떠’의 깃 발을 들고 다시 일어났다. 1894년 10월 동학농민군은 공주 감영을 점령했으나 곧 관군과 일본 군 연합군에 패하였고, 11월에는 우금치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하였다.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동학 지도지들이 체포되었다. 청국에 승리한 일본군은 타이완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고, 리:오둥반도를 전리품으로 차지했 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손을 잡고 일본의 랴오둥반도 할%에 반대했다. 심국간섭에 직면 한 일본은 청일전쟁 전리품으로 할양받은 랴오퉁반도를 도로 내 놓게 되었다. 1. 경기도 독립운동의 배경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