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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약 1,500명의 일본군을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시죄, 폭도의 처벌, 피해 보상, 출병비의 배 상등을요구했다 (3)갑신정변 2년 뒤인 1884년 김옥균, 빅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청국의 과도한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 고, 일본처럼 내정개혁을 통해 근대국기를 이룩하고자 정변을 계획했다. 이들은 1884년 12월 4 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히- 만찬회를 이용히여 사대당 요인들 을 죽이고 정권을 집았다. 그러나 고종은 다시 청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청국군 600명이 개입함으로써 개 화파의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숙청의 칼바람을 피한 김옥균 서재필 등은 일본 등지로 망 명했고, 개회에 대한사회적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1잃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에는 청국군과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무력충돌 가능성이 커 졌 다. 조선의 민심은 일본에 적대적이었다. 일본은 당황스러웠다 . 1885년 4월 18일 청국과 일 본 %댁군의 동시철수, 조선 파병시에는 통지의 의무를 규정한 「댄진조약」을 체결한 후 청 · 일 %댁군은철수하였다. (”청국간섭의심화 갑신정변 후 리홍장을 대리하여 위안스카이(휠111꾀Q가 1885년 10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 의라는 직함으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내정간섭이 더욱 심 해졌다. 그는 고종의 폐위까지 본국에 건의할 정도였다. 고종괴- 민왕후는 위안스카이를 싫어했다. 마침 러시이-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pπ MBillloBlfti Be6ep. l뻐1∼ 1910)가 부임해 왔다. 1886년 7월 고종은 이들을 통해 유사시 러시아황 제의 도웅을 요청히는 편지를 보냈다.(제2차 조러밀약사건) 조정은 친청파와 친러파 등으로 분열 되었다. 조선 조정의 분열은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청국에게 기회였다. 민왕후의 조키로서 고 종 의 핵심친위조직인 내무부의 부사였던 민영익 조차 고종이 러시아 세력과 띤대하려 하자 청 국에 밀고했다 . 청국은 고종에게 입F력을 가해 진러파를 제거하게 하였다. 28 II .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