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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을 받았다 . 일본은 이에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영종진(水宗鎭)에 상륙하여 살육·방 화·약탈을 자행한 뒤 포격행위에 대한 사죄 조선 영해 지유항해 및 측량, 강화도 부근 항구 개 항을 요구하며 군힘-6척을부신-햄 l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고종은 일본의 강요_7~ 아니더라도 개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1876년 2월 26일자로 12조로 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그해1876년과 1880년 2차에 걸쳐 수신사를 파견하고 다시 1881 년 1월 박정양 등으로 조사시찰단을 임명 일본의 신문물 제도를 조사했다. 또한 1880년 개화정 책추진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1881년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38명의 유학생을 선발히여 청국에 국방기술을 배워오게 보냈으며, 1882년 4월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등 서 구제국과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 임오군란 1882년 6월 9일 선혜청 도봉소(那꿇떼에서 구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치를 지급하는데 겨와 모래 섞인 쌀을 지급했다. 군병들이 이에 항의하지- 위력으로 탄압 하였다. 이에 군인들이 동별영과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신식군 대 훈련을 지원하는 일본공사관도 공격히여 불태웠다. 하나부사{따j찮質) 공시는 가끼-스로 인 천으로 탈출하였다. 군란 이틀째인 6월 10일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영돈녕부시- 이최응{수따땐), 선혜청 당oJ.J이자 군부대신 민겸호와 경기김-사 김보현이 실해되고 민씨 척족의 비호지-인 왕후 민씨(후에 명성황후)는목숨의 위협을느끼고 궁녀로 변장하여 탈출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다. 대원군은 군권과 재정권을 정4익히였으며, 고종의 개 회-정책을 쇄국정책으로 되돌렸다. 그런데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기-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 여 청국에 파견되어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을 통하여 청국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청국은 3천 명 의 군대를 파견히여 일본군을 제압하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넙치하였다. 청국의 내정간섭이 심 화되었다. 청국의 간섭에서 벗아나기 위해 고종은 일본 미국 러시이-등 다른 외세를 활용하고 끌어들이고자 위험한‘국제적 팅펑’이라는줄타기 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부사 일본 공사 일행은 서울을 탈출히여 6월 15일 나기-시키(따싸)에 도착, 군란 사 실을 외무성에 타전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4척의 군함, 3척의 보급선 1. 경기도 독립운동의 배경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