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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식민지수탈정책 일본의 산업화기- 진전되면서 쌀의 생산인구의 도시 유출 소득의 증대로 쌀소비 증기- 등으로 만성적인 식량부족문제에 직면했다. 1918년 8월 미소동\*-1剛iJJ)이라는전례없는서민들의 폭동 을 경험힌- 일본은 조선에 신-미증식계획따米댐센;바11)이라는 조선의 식량기지화 정책을 추진했 다. 1920∼1925년간 제1차, 1926년부터 제2차 사업을 시행히-여 수리시설, 관개개선, 개간, 간 척과 품종개량, 시비증대, 경족법 개선 등으로 3억 2천만원의 지금을 쏟아부어 920민- 석의 쌀 을 증산하도I지- 했다. 이리히여 1920년 8개이던 수리조합은 1928년 190개로, 몽리면적은 8,746 정보에서 22만 9,035정도로 늘어났다. 이 사업의 결과는 우리 민족에게 재앙이었다. 수리조합 비의 부담으로 중소지주와 자작농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급증했다. 쌀은 1912년의 1156민 8천 석에서 1930년에 1351만 1천석으로 증산되었으나, 조선 농민의 1인당 쌀 소비량은 0.77석에서 0,45석으로 크게 감소했다. 일본에 수출된 미곡은 291만석에서 542민-6천석으로 거의 배 가까 이 증가했다. 조선의 농민들은 ‘쌀밥은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조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 지가되었다. 1920년대 식미증식계획은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고서도 소기의 성과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일 제는 그 원인이 조선의 기층 향촌공동체의 적극적인 침여를 얻지 못한 채 관에서 일방적으로 추 진했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1930년데 들어 조선의 기층사회의 신앙과 동성(同까)마을〈일 본은 ‘동족부략이라 했다) 등 기층 향촌공동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했다. 이것은 조선 농촌정 책에 기층 공동체적 유대를 꿀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 일본의 패망끼-지 15년 동안 파괴와 살상, 강제동원의 시작이 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족산업을 억입F하기 위해 회사를 세울 때 허기를 받도록 히는 「회사령」을 제정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일본은 전쟁 특수경기의 최대 수혜국이 되 어 만성 적자국에서 흑지국으로 올라섰다. 조선총독부는 넘쳐나는 일본자본의 조선 진출 길을 터기 위해 「회사령J을 철폐했다.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밀려들어 조선 전체 자본의 80∼90%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을 위한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드는 데 펼요한 식료품 공업괴- 방직공 업에집중투자되었다. 106 II. 경기도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