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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면과 청북면에서도 독립만세를불렀다. 3월 11일 평택역 앞사거리에서 병남면 비전리 마곡상이도생수때ll 30세)의 주도로수백 명 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문리 다리로 행진히-였다. 일본 경칠이 출동하여 주도자 13∼14명이 체 포되었다. 4월 1일 평택의 각 상점이 일제히 폐점히여 독립운동에 동침하였다. 그날 밤 10시반경 평택 주변 일대 산봉우리마다 봉회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10여개 미을에서 3,000명의 군중 이 펑택으로 모여 들어 새벽 2시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 경찰의 무단발포로 1명이 숨지 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부용면(맹성)에서도 평택구읍 뒷산에 봉화를 올리며 펑택역 시위에 합 세하였으며, 고덕면 율포리에서 500여명의 농민들이 청북면에서 수십명이 미을에서 만세를불 렀다. 4월 2일 오성변과 외삼면에서 1,000여 명의 주민이 송틴면 독곡리에서 5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10일 서탄띤 금암리에서 100여 명이 주재소를 습격히-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이 발 포하여 1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했다. (21) 여주지역 :l·l운동 여주군에서는 금사띤(딴沙l띠) 이포리(잦폐띤)에서 4월 1일 3,000여 명의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크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북내면(」며·JI띠)에서는 4월 3일의 오금리(f표今면) ·오학리 (j]J.때里) 주민 800여명이 공북학교 마딩에 8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여주 읍내를 거쳐 오 학리까지 행진했다. 천송리 ·당우리에서는 신록사에,,폐좋) 승려 인찬〈仁f했) 김용식(金깐때)의 주도 히에 약 200멍의 주민들이 한깅?}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배가 없어 해산했다. 4월 3일 북내면에서는오금리 -오학리 ·오금리 ·현암리 ·징방리 · 덕산리 · 외룡리와 비록 강대안 의 천송리·당우리 등에서 북내면을향해 오면서 시위를전개하였다. 일제는오금리·현암리에 서 45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현암리 주민 200여 명은 곤봉과 돌로 맞섰다. 일제 헌병은 발포하 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3명이 목숨을 잃고, 1명이 부상히였다. 102 II 경기도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