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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한은, “1919년 3월 28일 노옹사리 경찰주재소에 인치된 이정석을 찾아 오러 간다는 것이었으므로 주막리(써짜 lj!.) 라는 곳에 가서 보니 따수의 이민 ( lj!J() 이 모야 있었는데------”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시위에 참여한 동기가 자말적이었음쓸 말한다. 또 최주환의 경우에도 “1919년 3월 28일 오 후 7시 경 에 홍순필 (싸JI띠폐) 의 음식점 앞에 많은 이 민들이 모여 있고, 최호천 과 이종운(이종원의 마른 이름.글쓴이) 양인이 ‘오늘밤 노옹사 주째소를 슴격 하여 이종운의 장남 이정석을 탈활할 계획이니 모이라’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참가하여 ----”라고 진술하였는데, 이도 시위참가의 동기가 매우 자말적이었 음을 말한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를 시위대가 포위한 때 가 오후 10시경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오후 7경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는사실은이 시위가시전에 충분히 서전되어 조직되었음을 말한다. 시위에 참여하는 포습이 배우 자발적이면서, 동Oiitl), 리 (I j!.) 단위의 집단 시위참가를 광명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동 리 딘-위로 거행된 시위에서, 시위대가 동 · 리 안의 한 장소에 모여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집회장소로 향하였다. 앞서 본 김인환·최주환의 경우를 보면, 이띠 주딱리나 홍순필의 음식점에 많은 이민들이 모여 있었다. 윤의병이 이순만괴- 함께 20여 명의 인윈을 이끌고소하리 내대촌으로가니까면사무소부근에 이미 약 50명 이 모여 있었는데 최호천이 이를 인솔하고 있었다. 이때 최호천은 윤의병에게 “이 인윈만으로 부족하니 내가리대리의 사람들도 모아서 습격하지-.”하고 말 을 꺼내고, 각각 이끌고 있던 시위대를 합하여 가리대리로 향하였다. 윤의병이 다시 부근의 동리인 내가리대리의 동띤 1 백 명을 더 모집하여 모두 2백여 명 이 되었다. 이를 보면 시위인원을 동원하는 방식이 동·리의 단위j료 이루어졌 고, 또 행동도 무리를 지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미- 대중통 제가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4) 장영지역의 3· l독렵만세운동 84